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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독감 전국 비상/"자식같은 오리 묻고… 먹고살 일 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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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독감 전국 비상/"자식같은 오리 묻고… 먹고살 일 갑갑"

입력
200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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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시 산포면 오리농가 르포"평생 오리만 키웠는데…. 이제 오리 농가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22일 오전 조류독감 발생이 확인된 전남 나주시 산포면 매성리 일대. 아침 일찍부터 오리 매몰작업이 시작되면서 오리 농가에서는 산채로 땅속에 묻히는 오리의 울음소리와 농민들의 한숨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날 멀쩡한 오리 1만6,000마리를 땅 속에 묻은 강봉구(40·매성리 1구)씨는 자식 같은 오리들이 묻혀 있는 농장 뒤편 '오리무덤'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강씨는 "이제 먹고 살 일이 갑갑하게 됐다. 1억원이나 빚을 내 오리농사를 지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조류독감의 불똥이 마침내 오리농가의 줄도산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조류독감으로 너나 없이 비상이 걸려 있는 나주 등 전남지역 오리 농가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다음은 어디냐"며 거의 공포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특히 19일 부도를 낸 전국 최대 규모의 닭·오리 가공업체인 (주)화인코리아의 나주·보성지역 위탁사육농가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전남지역 오리 사육규모는 전국의 48%인 380만 마리로 이중 화인코리아 140여 계열농가가 사육하고 있는 오리는 130만 마리에 이른다.

이 달 초 오리 1만 여 마리를 납품한 김종태(44·보성군 조성면)씨는 "회사측으로부터 사육비 6,000여만 원을 받지 못해 부도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며 "은행권에서는 블랙리스트에까지 올라 돈도 빌려주지 않아 공과금도 못 낼 형편"이라고 한탄했다.

화인코리아 위탁사육농가들로 구성된 오리사육농가협회에 따르면 화인코리아 부도 직후 이날 현재까지 부도를 맞은 농가는 10여 농가에 달한다. 또 10여 농가가 금융권에서 신용불량자로 찍혀 자금줄이 막히는 등 30여 농가가 직·간접적인 부도 위기에 몰려 있는 상태다.

오리사육농가협회 김영일 회장은 "농가들이 화인코리아로부터 지급 받아야 할 오리 사육비를 되돌려 받지 못한 데다 출하도 못해 자금난에 빠지면서 연쇄 부도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현재 농가들이 지급 받지 못한 사육비는 농가 당 최하 4,000만원에서 최고 8,000여만원으로, 전체 체불규모는 70여억 원에 달한다.

산포면 신도리에서 오리를 키우는 김익장(40)씨는 "사육비를 받지 못한 오리농가들의 자금난은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정도"라며 "특히 금융권의 신규여신이 불가능한 데다 연말 여신회수까지 당하고 있어 언제 망할지 모른다"고 고개를 떨궜다.

부도 위기감은 인근 양계농가로도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농가들은 조류독감의 남하 소식에 따른 허탈과 불안감 때문에 일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주시 금천면에서 닭 2만여 마리를 키우는 최모(51)씨는 "우리농장에서는 조류독감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다 자란 닭을 출하하지 못하게 돼 앞길이 막막하다"며 "특히 농민들의 줄도산이 현실화하면서 내 차례가 언제 닥쳐올 지 불안해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주=안경호기자 khan@hk.co.kr

■ 사태 얼마나 갈까

지난 15일 충북 음성에서 최초 확인된 조류독감이 불과 일주일만에 남해안 지역으로까지 번지는 등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조류독감의 이같은 확산은 '철새'라는 자연적 요인에 '허술한 방역'이라는 인재(人災)가 상승 작용을 일으킨 결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전염병의 특성상 일단 전국으로 확산됐다면 사태의 조기 종료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기온이 상승해 바이러스가 자연적으로 사멸하는 5∼6월까지는 조류독감이 시차를 두고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사태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겨울 내내 조류독감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한 것은 기온이 내려갈수록 독감 바이러스의 생존기간이 길어지고, 주요 감염원으로 추정되는 청둥오리 등 철새들이 기온 변화에 따라 남하와 북상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성환우 박사는 "조류 독감 바이러스는 섭씨 22도 상온에서는 물에서 4일밖에 살지 못하지만 섭씨 0도에서는 20일을 견딘다"며 "겨울에는 독감 바이러스 방역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철새들의 습성도 사태 해결에 걸림돌이 된다. 조류학자들에 따르면 청둥오리 등 철새들은 한반도에 머무는 겨울철에도 기온이 내려가면 좀 더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올라가면 북상하는 행태를 거듭한다. 이 과정에서 철새에 의해 독감 바이러스가 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철새들이 시베리아로 돌아가고, 기온이 상승하는 봄이 찾아오기 전에는 조류독감 사태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조류독감의 조기 박멸이 어려워짐에 따라 정부 대책도 바뀌고 있다. 조류독감이 전국으로 확대된 것으로 밝혀진 22일 이후 방역 대책은 최초 감염원 파악에서 추가 확산 방지로 급선회하고 있다. 김정호 농림부 차관은 "감염원을 찾는 것보다는 전국적 감염 상황을 파악해 추가 확산을 막는데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농림부는 이에 따라 조류독감에 취약한 닭이 오리로부터 감염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닭농장과 오리농장을 격리하는데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전국적 사육규모가 800만마리에 불과한 오리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오리 보다 사육규모가 12배나 많은 닭(약 1억1,000만마리)에서 대규모 감염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농림부는 조류독감 발생 지역에 대한 도살 처분도 강화키로 했다. 발생농가 반경 3㎞ 이내 위험지역에서는 닭과 오리를 모두 도살하고, 반경 3∼10㎞ 경계지역에서는 오리를 처분한다는 게 농림부 방침이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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