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이나 하와이 가는 게 제주도 가는 것만큼 쉬워진 요즘 해외 여행은 돈과 시간만 허락하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됐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외국에 나가기가 어마어마하게 힘들었다. 지금 들으면 참 촌스러운 이야기 같지만 연극 배우로 산 덕분에 나는 일찌감치 해외 나들이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집단 창조 작업의 첫 작품인 '무엇이될고하니'가 1981년 10월16일부터 25일까지 스페인의 '시제스 국제연극제'에 초청됐다. 국내 극단으로서는 처음으로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연극제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기회는 잇따랐다. 그 해 11월4일부터 8일까지 프랑스 렌느에서 열린 '오늘의 뮤지컬 시어터 페스티벌'에도 초대를 받았다.초청은 받았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자유'가 두 개의 국제 연극제 참가를 결정한 것은 극단의 재정 형편만 놓고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국제연극제 주최측이 축제 기간 중의 체재비를 대고, 배우 한 사람에 하루 30달러 가량의 출연료를 받기로 했다. 나머지 3개 도시 공연도 비슷한 수준으로 계약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전체 비용의 3분의 1 정도만이 확보된 셈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스페인 시제스로 날아갔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국의 연극을 해외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우리는 88 서울올림픽도 치르기 전이어서 '코레아'가 세계지도 어디쯤에 박혀있는 줄도 모르던 그 시절에 문화 홍보 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스페인의 시제스는 바르셀로나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관광 도시. 여름 시즌이 끝나는 10월15일부터 말일까지 매년 스페인 최대 규모의 국제연극제가 열리고 있었다. 1981년 14회 째를 맞은 '시제스 국제연극제'는 30여개국에서 50개 단체가 참여한 대규모 행사였다. '무엇이될고하니'는 19세기에 지어진 800석 규모의 프라도 극장에서 공연됐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연극제 프로그램에 극단 자유가 북한에서 온 걸로 적혀 있었다. 지금이야 나아졌지만 그때가 어떤 시절인가. 공연이 중단되는 등 한바탕 야단법석이 벌어져야 했다.
그로부터 4년 뒤 우리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피의 결혼'을 들고 다시 스페인을 찾았다. 이번엔 바르셀로나였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빼어난 극작가 가르시아 로르카의 연극을 들고 본고장을 찾아 나선 건 일종의 모험이었다. 미국인이 한국에 와서 춘향전을 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를 초청한 스페인 극단과 주최측이 사이가 좋지 않아 무척이나 속을 썩였다. 그래도 우리는 꿋꿋했다. 이병복 선생이 디자인한 한복 라인을 살린 의상을 입은 우리는 한국적 정서가 물씬 배어나도록 연출된 '피의 결혼'을 선보였다. 반응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로르카는 배반당하지 않았다'라는 명징한 헤드라인과 함께 우리의 공연을 격찬한 기사가 공연 다음날 현지 신문에 큼직하게 실렸다. '코레아, 그 조그만 나라에서 이렇게 큰 작품을 가져오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가 국제적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그런 내용의 리뷰였다. 그 평을 본 김정옥 선생은 이런 촌평을 덧붙였다. "야, 박정자는 이미 국제적인 배우야, 뭘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어?"
그 뒤로도 극단 자유는 일본으로, 프랑스로 공연을 다녔다. 해외 공연 횟수가 늘어나면서 외국에 나갈 때의 준비도 점점 철저해졌다. 일본에 갔을 때였다. 우리는 일본 공연이 끝나고 바로 이어질 유럽 공연에 대비해 일본에서 전기 밥솥을 사고 여러 종류의 반찬거리를 잔뜩 챙겨갔다.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 칼카존 공연에서는 옛 귀족들의 성을 숙소로 썼는데 배우들이 조를 짜서 돌아가며 장을 보고 식사 당번을 했다. 꼭 고추장이 있어야 밥이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우리의 애틋한 조국애는 그렇게 엉뚱한 장면에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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