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 콜라타 지음·안정희 옮김 사이언스 북스발행·1만5,000원
해부결과 폐는 스펀지처럼 물컹거렸고 피거품이 스며 나왔다. 환자도 유아나 노약자가 아니라 20∼40대의 건장한 사람들에 집중된 것도 이상했다. 이렇게 1년 동안 속수무책으로 죽어 간 사람이 최소 2,000만 명, 최대 1억 명으로 추산된다. 미국에서만 55만명이 사망해 당시 평균 수명이 51세에서 39세로 내려갔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 당시 인구의 30∼50%인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후 인류 최대의 재난이었다.
일명 '스페인 독감'으로 불린 살인 바이러스의 정체는 20세기 의학계의 주요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어디서 발생했는지, 어떻게 이처럼 삽시간에 퍼지며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지, 왜 젊은 사람만 공격했는지는 아직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고 있다. '독감'은 이 변종 바이러스의 발생과 이를 밝혀내기 위해 과학자들이 80년 넘게 벌여온 사투와 같은 추적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각국 정부는 감염경로를 찾기 위해 생체실험부터 시도했다. 미 해군은 수감된 범죄자를 대상으로 실험 후 살아 남으면 사면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들의 눈, 귀, 입에 독감 바이러스를 뿌렸다. 병상에서 죽어가는 독감 환자들의 숨을 죄수들이 들이마시게 하고, 환자의 점액과 배설물을 채취해 코와 목구멍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죄수들은 모두 멀쩡했고, 오히려 실험 팀 의사 한 명이 독감에 걸려 죽었다.
50년대부터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체를 발굴해 바이러스를 분리하려는 노력도 시작됐다. 과학자들은 알래스카의 영구 동토에서 얼어붙은 시체의 허파를 떼어내 배양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또 57년에는 아시아 독감으로 100만 명, 68년에는 홍콩 독감으로 70만 명이 숨지자 백신개발에 주력했고, 76년에는 미 의회는 독감예방접종 프로그램을 위해 1억3,500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하기도 했다.
의학과 과학의 발전으로 미 육군병리학연구소에 보관 중인 조직을 분석해 1918년 살인독감 바이러스는 1만5,000개의 염기로 구성됐다는 사실과 일부 유전자 서열을 밝혀냈다. 사건 발생 80년 만에 살인 바이러스를 '체포'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살인독감의 전파경로와 원인에 대한 과학자들의 가설은 분분하다. 가장 널리 퍼진 학설은 미 캔자스주의 한 돼지농장에서 배설물을 태우면서 나온 거대한 검은 연기에 실려 퍼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독감 바이러스가 체외에서는 금방 죽어버린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성이 적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볼 때 특정 지역에서 발생해 전파된 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독감의 일반적 사망 경향과 달리 20∼40대의 희생이 컸던 것은 나이가 들수록 바이러스에 취약해지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과거 서구인들이 북아메리카에 퍼뜨린 홍역, 수두, 천연두로 인해 인디언과 에스키모들이 쓰러져갈 때 아이들은 경미한 증세만을 보인 것도 이를 입증한다는 설명이다. 또 40대 이후 연령층에서 사망률이 줄어든 것은 과거 바이러스에 노출돼 면역성을 갖게 된 결과라고 추정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다시 공세에 나서더라도 현대 의약기술은 그때처럼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 허파 속으로 밀려오는 폐렴 병균을 막아낼 항생제가 있고 공격을 무디게 할 신종 의약품도 개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2년 이후 나타난 사스(SARS·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나 최근 유행하는 조류독감은 변종 바이러스의 반격이 만만치 않은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문서기록, 과학적 분석자료에 바탕한 생생한 묘사, 전염병을 추적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 등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하다. '복제양 돌리'를 쓰기도 한 지나 콜라타(뉴욕 타임스 과학기자)의 역작으로 1999년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