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앨 고어 전 부통령이 하워드 딘 버몬트 주지사 지지를 선언하면서 미국의 대선가도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고어의 선언에 힘입어 딘의 지지도는 30%대를 훌쩍 넘어서 '고만고만'하던 민주당 경선판도를 일거에 평정했다. 조지 W 부시에게 패한 이후 분열과 지리멸렬 상태의 민주당에 단합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에, 민주당이 부시에 맞설 선두주자를 갖게 됐다고 들뜬 모습이다. 딘의 부각을 바람이라고 여길 만한 것은 그가 시골 버몬트 출신으로 워싱턴의 기성정치와는 정반대의 매너와 사고를 가진 비주류이기 때문이다.■ 시골 출신의 비(非)워싱턴 인물로 조지아주의 지미 카터나 아칸소주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흔히 예시되지만 중앙 정치에서 딘은 이들보다도 더 무명인 사례로 꼽힌다. 가는 곳마다 강조되는 딘의 연설내용도 "우리는 워싱턴류와는 다르다"는 말이라고 한다. 화법이나 연설매너도 파격적이다. 확신에 찬 유창한 연설에 대답은 막힘이 없고, 웬만한 연설에서 연단을 쓰는 법이 없다. 설치된 고정 마이크 대신 핸드 마이크를 즐겨 사용하고, 문장의 마지막을 올리는 선동체보다는 말꼬리를 내리는 대화체 연설로 친밀하게 청중을 파고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을 '이 친구(this guy)'라고 조롱조로 부르며 부시 정권을 향해 "워싱턴의 무뇌인(無腦人)들"이라고 가하는 공격은 신랄하기만 하다.
■ 때묻지 않은 비주류, 친근한 인상과 거침없는 화술은 무명정치인이 뜰 때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바로 그 장본인임을 1년 전에 우리도 겪었다. 그러나 미국이 주시하는 딘의 과제는 정치적 정체성을 일반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지적된다. 현안에서 그는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진보성향을 보이지만, 미국정치에서 정치성향의 잣대인 낙태와 총기소지 문제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다. 낙태를 찬성하는 리버럴리스트이면서도 총기규제는 반대하는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클린턴처럼 중도적 처신으로 부동층을 끌어 당길 전략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아웃사이더 딘의 가능성은 내년 1월 말 뉴햄프셔주 예비선거에서 판가름난다.
■ 바람은 신선하다. 쌓인 걸 날리고 새로운 걸 가져온다. 단, 선거에서 바람은 합리나 검증과는 거리가 있다. 딘의 경우처럼 거기에는 미지의 모험이 내포돼 있다. 노 대통령을 당선시킨 지난 해 바람은 신선해서 좋았다. 그럼, 지금도 좋은가. 한때의 바람이 대통령을 선택했는데, 나라는 표류하고 있다. 그 바람에도 그 때는 필연성이 있었겠다. 그러나 바람이 결정한 다음이 이 지경이면 그런 바람은 두렵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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