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한뼘 드라마'에는 스토리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극적 사건'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봐야 헤어진 연인이 살던 빈집에 들어가 냉장고 속에 남은 음식을 먹는다든가('그녀의 냉장고 안에 머물러 있는 것'), 비 오는 날 레스토랑에 두 손님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고도를 기다리며')이 전부이다.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걸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는 뱀파이어('나는 뱀파이어다'), 행운과 불행을 계속 반복해서 가져다 주는 동전('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동전 하나')처럼 독특한 소재를 다루기도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에서도 시청자가 흔히 바라는 특별한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뱀파이어는 자신의 존재에 회의를 느끼다가 사라져 버리고, 동전은 그것에 별로 집착하지 않는 주인공 탓에 다음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매회 5분씩, 1주일에 단 4회 방영으로 한 작품을 끝내니 어쩌면 이런 '심심한'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대체 뭐 하러 이런 걸 만들까. 기존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라면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뼘 드라마'는 독특한 재미가 있다. 바로 한 뼘 안에 딱 알맞게 들어있는 정말 작고 순간적인 우리들의 감성 때문이다. 회당 몇 십분 씩, 몇 달 동안 방송하는 드라마들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위해 계속 새롭고 극적인 사건을 만들어낸다. 시청률을 아예 포기하고 '컬트'를 만들겠다면 모를까, 정 안되면 등장인물을 죽였다가 살리기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분량과 시청률에서 자유로운 '한뼘 드라마'는 다른 방법으로 '드라마'를 보여준다. 극본을 쓰는 작가집단 '스토리 밴드'가 생각하는 '스토리'란 '사건'이 아니라 사람 각각의 '사는 이야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짧은 순간 순간들, 그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감성이나 작은 깨달음이 이 드라마의 진짜 스토리이다. 비 오는 날 아무도 오지 않는 레스토랑의 적막함, 헤어진 연인의 옛 집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보며 느끼는 슬픔과 설움이 섞인 느낌들이 모두 그 자체로 드라마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여느 드라마와 달리 '한뼘 드라마'는 등장 인물에 몰입하는 대신 차분히 관찰해야 하고, 그 인물이 어떻게 될지만 바라보지 말고 그가 놓여있는 공간의 분위기를 느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황인뢰 PD의 연출력에 의해 구체화한다. '그녀의 냉장고…'에서 남자가 들어간 빈집이 만들어내는 쓸쓸한 느낌이나 '고도를 기다리며'(사진)에서 레스토랑을 꾸미는 와인병과 술잔의 풍취는 일반적인 스토리의 속박에서 벗어난 PD의 연출력이 빚어낸 결과다.
'한뼘 드라마'는 작고 소박하기 때문에 오히려 드라마의 여러 가지 제약에서 자유로운, 꽤 큰 드라마이다. 물론 MBC에는 '베스트 극장'이라는 비슷한 사례가 있지만 '한뼘 드라마'는 방영시간이라는 제약마저도 벗어나면서 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올해 MBC가 '앞집여자' '다모' 등 새로운 감각의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발상의 전환 덕분이 아닐까. 크기는 한 뼘이지만, 그것은 누구도 내딛지 않았던 한 뼘이다.
/대중문화평론가 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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