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가족은 참 특별하다. 전통적인 가족의 틀이 무너진 지 오래지만 남남으로 갈라서도, 심지어 죽어서도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가족이다. 그래서 때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짐이 되지만, 인연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한다.2004년 첫 날 문을 여는 KBS2 수목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연출 김철규·기민수)는 그 질긴 가족 관계를 정면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작가 노희경씨는 "가족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굳이 꼽자면 엄마가 중심"이라고 했다. "그 사람 뱃속에서 나왔는데 그 사람을 몰라서야 되겠는가는 생각을 삶의 화두로 삼아왔다"는 그는 "바보 같은 엄마가 세상을 얼마나 지혜롭게, 재미있게 살아가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숫자만 간신히 아는 무지렁이에다, 딴 살림 차린 남편(주현)을 원망할 줄도 모르는 엄마 영자 역을 고두심(52)이 맡은 것은 좀 의외다. 연기력이야 입 뗄 필요가 없지만 강인한 어머니, 참한 며느리 역을 주로 맡아온 그가 아닌가. "그래서 걱정도 되고 기대도 커요. 영자는 한없이 약하고 부드럽고 푼수 같기도 해요. 하지만 휘청휘청 대면서도 절대 쓰러지지 않죠. 힘없이 휘었지만 부러지지 않는 나뭇가지 같다고 할까. 그런 느낌으로 연기하려 해요."
그는 이 작품을 위해 동시에 캐스팅 됐던 MBC '귀여운 여인'의 꽃뱀 엄마 역을 포기했다. 무엇보다 따뜻한 가족 드라마라는데 마음이 끌렸고, 작가에 대한 믿음도 한 몫 했다. "영자는 작가의 어머니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노희경씨가 10여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병상에 있을 때 '엄마, 소원이 뭐야. 다 해줄게' 했더니 '내 청춘 돌려도' 하셨대요.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던지…. 작가와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다 보니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감이 잡히더군요." 노씨도 "영자가 된 그의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모른다. 요즘 '엄마, 바람 났지' 하면서 고두심씨 놀리는 재미에 산다"고 애정이 잔뜩 묻어나는 말을 보탰다.
고씨는 "촬영장 분위기가 진짜 가족 같다"고 자랑했다. "큰 딸 역을 맡은 종옥(배종옥)이야 원래 호흡이 잘 맞고, 작은 딸 고은(한고은)이도 겪어보니 착하고 속이 꽉 찼어요. 아들 역의 김흥수는 진짜 모자처럼 착착 달라붙고."
그는 자식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영자를 보면서 "내 새끼들한테 잘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딸은 미국에서 대학 마치고 취직했고, 고3인 아들도 미국 유학중이다. "자식이라고 이것저것 다 해주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아이들이 좀 무서워해요. 엄하게 키우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집에 오면 음식은 잘 해 먹여 보내야지, 하고 다짐해요."
16일 오후 촬영장인 서울 원효로의 한 마트에서 진행한 인터뷰는 그를 알아본 아줌마 팬들이 종이와 펜을 들이미는 바람에 자꾸 중단됐다. 그는 사인 끝에 꼬박꼬박 '2004.1.1.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글귀를 적어넣었다. "자극적인 드라마가 판을 치고 그런 드라마가 시청률 높은 게 현실이죠. 하지만 사람 냄새 나는, 좋은 드라마를 원하는 시청자들도 적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많이 많이 사랑해주세요."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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