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소개한 영화 이야기는 아무래도 한 회 분량으로는 도저히 그칠 수 없을 듯하다. 영화를 찍을 때의 이야기를 남자들이 군대 갔다 온 이야기하듯 밤새워 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기회를 그냥 이렇게 놓칠 수 없지 않은가. 잊지 못할 두 편의 영화 이야기가 더 있다.먼저 장면 1, 1977년 제주도 앞바다. 옷을 홀딱 벗고 있어도 더위가 가시지 않을 복중에 겹겹이 무복(誣服)을 껴입은 무녀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김기영 감독에 의해 영화 '이어도'에 캐스팅된 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영화에서 나는 어김없이 무당이다. 영화나 연극에서 무당 역을 하도 자주 맡아서 하는 말이다. 오죽하면 내가 기독교 신자라는 걸 알면 놀라 자빠지는 사람들이 있을까. 어쨌든 만신(萬神)할 일이 굿판 벌이는 것 말고 뭐가 있겠나. 신을 모셔 놓고 한판 굿거리를 해야 할 참인데 감독은 내게 아무런 주문도 하지 않는다. 땡볕에 나는 하염없이 서 있다.
한참 후 그는 입을 뗀다. "미스 박(그때 나는 이미 결혼했었지만 그분은 항상 날 이렇게 불렀다), 움직임을 신(神)과 섹스하는 기분으로 해 봐요." 머리에 번개 한 방을 맞은 느낌이다. 막막하던 나는 힌트를 얻는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손에 쥐고 있던, 손잡이를 붉은 천으로 싸맨 무당방울을 세차게 흔든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도록 춤을 춘다. 아니러니컬하게도 크리스천인 나는 무당 옷을 입고 신을 청하는 춤을 추며 "하느님! 오늘 이 어려운 장면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하고 부르짖는다. 그때 하느님은 분명히 나를 어여삐 여기셨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장면2. 임권택, 정일성, 전무송, 안성기씨가 설악산 오색 어디쯤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신다. 눈이 종일토록 아무 대책 없이 내린다. 자연히 영화 '만다라'의 촬영은 꽝이다. 눈을 내 눈 속에 담으며 매혹이란 단어를 떠올리던 나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그들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보며 신이 난다. 내일은 지산 역을 맡은 전무송이 눈에 파묻혀 얼어죽는 장면을 찍으리라 계획하면서. 소설가 김성동의 원작을 토대로 81년에 만든 영화 '만다라'는 수도승 법운이 파계승 지산과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 해 대종상 여섯 개 부문을 휩쓸 정도로 화제가 됐다.
'만다라'에서 내 배역은 아니나 다를까 산속 조그만 암자 주인, 이를테면 만신이다. 스케줄에 맞춰 촬영 현장인 설악산 오색에 먼저 간 스태프들을 따라간다. 나는 한 가지 생각을 감추고 있다. 무당이라는 이미지가 맘에 들지 않아서다. 그건 내가 원하는 인물을 통해 살고 싶은 배우로서의 허욕일지도 모른다. 임 감독에게 나는 말한다. "법운의 어머니 역이 하고 싶다"고. 그 어머니는 '만다라'의 마지막 부분, 지독히 짧은 한 장면에만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역을 갈망한다.
그날 저녁 임 감독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그는 예의 그 느릿한 어조로 "박정자씨, 우리 서울에서 만나요"라고 한다.
어머니가 나오는 신은 서울에서 찍어야 한다. 그날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스태프들에게 커피를 끓여 나른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어렸을 때 정욕을 이기지 못해 다른 남자를 따라 도망간 여자다. 세월이 흐르고 어머니와 아들 법운은 재회한다. "용서해다오. 내가 피가 너무 뜨거웠다." 법운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다. 욕심을 냈지만 막상 그 장면의 연기가 잘 되지 않는다. 부끄럽다.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영화에 나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 무대 위에서의 엄마라면 그토록 자신이 있었음에도. '만다라'가 개봉되고 나는 혼자 단성사로 가서 몰래 가슴 두근거리며 그 영화를 본다.
녹슨 기억의 영사기를 돌리면 이 두 장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미치도록 뜨거우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웠던 두 장면은 화인(火印)처럼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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