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2000년 총선을 전후해 권노갑(구속) 전 민주당 고문에게 모두 2억2,790만원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안기부 예산 전용을 둘러싼 파문이 일고 있다.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15일 열린 국회 정보위 비공개 전체회의에서 국정원 관계자가 "1998년 5월부터 2000년 9월까지 18차례에 걸쳐 국정원 예산에서 10만원권 수표로 2억2,790만원을 권 전 고문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을 지난 10월 검찰조사에서 밝혔다"고 보고했다고 전했다. 이 기간의 국정원장은 이종찬, 임동원, 천용택씨가 연이어 맡았다.
홍 의원은 "국가 예산인 국정원 자금이 구 여권 인사에게 정치자금으로 전달됐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면서 "이는 '제2의 안풍(安風) 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현대 비자금 사건을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는 이날 권 전 고문의 계좌 추적 과정에서 현대에서 받은 비자금 외에 추가로 수억원의 자금이 입금된 사실을 확인하고 출처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특히 국정원 자금 외에도 청와대 관련 자금 수천만원이 권씨 계좌에 입금된 단서를 잡고 돈의 성격과 출처를 확인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권 전 고문측은 이에 대해 "1998년 8월 한보사건에 연루됐다가 사면 복권된 뒤 일본 외유를 앞두고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에게 신세지지 말라'며 수표 3,000만원을 줬다"고 밝혔다. 또 "99년 말 권 전 고문의 아들 결혼식 때 받은 축의금 2억원 중 일부가 국정원 계좌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들 자금은 권 전 고문이 개인적으로 받은 돈이며 총선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자금이 청와대 또는 국정원의 예산을 전용한 것으로 확인될 경우 이른바 '통치자금'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김대중 정부의 도덕성에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특히 계좌추적 과정에서 드러난 수표의 출처 조사와 관련해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로까지 이어질 지 주목된다.
5, 6공 당시 안기부 예산 등의 형태로 극비리에 관리돼 온 '통치자금'은 김영삼 정부 들어 규모가 크게 줄었으며, 김대중 정부에서는 아예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98년 4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차 출국할 때 국정원측이 관행이라며 안기부 자금을 건네려 하자 화를 내며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한편 국정원 관계자는 홍 의원의 주장에 대해 "권 전 고문 계좌에 입금된 수표가 국정원에서 발행된 것은 맞지만, 발행 후 2년 뒤에 입금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를 경유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진동기자 jaydlee@hk.co.kr
김지성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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