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마흔 다섯살 된 남자에게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를 붙이기는 쉽지 않다. 남자의 인생(굳이 남자가 아니더라도)에서 중년이란 게 대개는 세속의 때가 가장 많이 묻는 시기이므로. 그런데 차인홍(車寅洪)씨를 만나 보면 그만큼 어울리는 단어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외모가 그렇고, 마음 됨됨이가 그렇고, 무엇보다 그가 살아온 삶이 그렇다. 그가 최근에 펴낸 자전적 스토리에 출판사(토기장이 하우스)가 붙인 제목도 그래서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이다. 사실 그는 가치 있으나 묻혀있는 삶을 발굴한다는 취지의 이 지면에 딱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이미 미국에서 교수가 됐을 때, 또 앞서 그가 참여해온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을 통해 꽤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의 얘기를 하지않을 수가 없다. 그의 책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 그의 삶이 새삼스런 감동이었으므로. 그리하여 이 어려운 시기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힘을 주는 훌륭한 롤 모델(Role model)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누군가의 삶을 소개할 때 가장 안이한 방식은 연대기식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극적인 대목을 앞세우는 게 감동을 주는데 효과적이니까. 하지만 장애와 가난을 딛고 한발한발 계단 오르듯 성취를 이뤄낸 차인홍씨의 인생역정은 그 안이하고 담담한 기술방식이 오히려 적합하다)
대전의 구멍가게집 3남3녀의 막내인 그는 두 살 때 소아마비로 걸음의 자유를 잃었다. 그 나마의 가세도 기울어 초등학교조차 보낼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여덟살 그를 재활원에 맡겼다. 그 나이에 성치 않은 몸으로 엄마 품을 떠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두려움이었으랴. 방학 때 잠깐 집에 와 있다 다시 돌아갈 때마다 엄마의 치마자락에 매달려 울었다. "엄마, 나 안 갈래. 재활원 가기 싫어. 엄마 나 두고 가지마."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재활원에서 그는 평생의 인연이 된 바이올린과 만난다. 정상적으로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오히려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러하려니와 그 시절 음악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극소수 부자집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으니)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주변을 지나다 목발 짚은 아이들을 보고는 "저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웬지 모르게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틈만 나면 혼자 연습을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시간 외에는 따로 연습하지 않았거든요." 어머니를 졸라 어렵게 마련한 5,000원짜리 바이올린으로 1년 만에 충남도 콩쿠르에서 1등상을 따냈다. 재활원의 혹독한 군대식 규율생활 속에서 강냉이 죽으로 고픈 배를 달래가며 얻어낸 첫 성취였다. "신체적 열등감에 잔뜩 주눅든 소년이 처음으로 뭔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떴지요."
그가 받은 교육은 재활원에서 받은 초등과정으로 끝났다. 장애인을 받아주는 중학교는 없었다. 대신 재활원에서 일본의 장애인 기술학교에 보냈다. 1년간 호된 고생과 차별 속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고작 거친 나무를 다듬는 사포질 뿐이었다. 그러니 기술자가 돼보겠다던 현실적인 꿈마저 꺾였다. 돌아와선 방황이 이어졌다. 주변에선 "도장 파는 기술이라도 배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밥이나 축 내는 천덕꾸러기로서의 장래만이 보였다. 몇 년을 비참한 심정으로 헤매고 있을 때 또 한번 삶의 전기가 주어졌다.
바이올린을 처음 가르쳤던 선생님의 대학 제자가 찾아와 "너는 음악을 해야 한다. 바이올린을 다시 하라"고 떼밀었다. 그렇게 해서 재활원의 신체장애인 동료 넷으로 결성된 게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이다. 열 여덟 때였다. 음악을 통해 다시 삶의 목표를 얻었으니 그 이상의 기쁨이 어디 있으랴. 합숙소로 마련해준 작은 집에서 넷이 자취를 해가며 하루 10시간씩 연습을 해댔다. 겨울이면 그의 연습실인 퀴퀴한 연탄광 안으로 칼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추위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쉬지않고 바이올린 활을 움직여대는 것 뿐이었다.
정기연주회와 교회, 교도소 등에서의 공연을 통해 '휠체어에 앉은 천사'들의 존재를 알게 된 서울 정립(正立)회관에서 서울에 이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화음(和音)으로 이겨낸 신체장애의 역경(逆境)' 등 제목의 기사로 이들이 알려진 게 바로 이 때부터다. 당시 방한한 세계적인 첼리스트 피에르 푸르니에는 이들의 연주를 "영혼의 울림" "음악에 대한 살아있는 사랑" 등의 표현으로 극찬했다.
마침 고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했을 즈음 차씨 등은 오랫동안 그들을 지켜 본 주위의 도움으로 미국 신시내티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차씨가 뉴욕시립대에서 석사(바이올린)를 받고 귀국 후 대전시향 악장을 거쳐 사우스캐롤라이나대 석사(지휘), 그리고 3년전 오하이오의 라이트주립대 바이올린교수 겸 대학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발탁되기까지의 경력은 많이 알려졌으므로 굳이 상술할 필요가 없겠다.
물론 이 때도 쉬운 적은 없었다. 대전시향에서는 악기상 친구의 관세법 위반 사건에 연루됐다는 모함에 악장 자리를 팽개친 일도 있었다. 아내(조성은·趙星恩·43)의 재봉일과 레슨(아내는 경희대 음대에서 비올라를 전공했다) 등으로 헤쳐나간 맨주먹 유학생활의 어려움은 또 오죽했으랴.
하지만 차씨의 아름다움은 이런 역경과 성취의 드라마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의 축복(그는 독실한 크리스찬이다)과 주위의 사랑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의 인생 얘기는 전체가 그를 도와준 이들에 대한 헌사(獻辭)에 가깝다. 처음 재활원에서 바이올린을 접하게 한 강민자 선생님(재미), 포터블 전축(예전 '야전'이라 불리던 그것이다)으로 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주었던 재활원의 미국인 봉사자 젠 영, 베데스다를 만들어 혹독한 훈련으로 음악적 기초를 만들어준 고영일 선생님, 유학길을 틔워준 김태경 목사(재미)와 정립회관, 장애를 문제시 않고 실력으로만 평가해 준 유학시절의 스승들….
그러나 누구보다도 고마운 이는 아내다.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영화와도 같다) 베데스다 결성 무렵 고영일 선생의 레슨 여고생이라는 인연으로 처음 만난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맏딸이었다. 미모도 빼어났다. 초등 학력에 장애인 콤플렉스를 가진 그로선 애당초 오를 수 없는 나무였다. 하지만 인연은 알 수 없는 법. 서울에서 대학생이 된 그녀를 다시 만나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가 미래를 감당키 어려워 1년간 결별을 선언했을 때도, 유학을 떠났을 때도 그녀는 기다려 주었다. 유학 직전 그와 약혼식까지 한 사실을 안 그녀의 집에서 난리가 난 건 당연한 일. "처음부터 그가 남으로 보이지 않았다"던 그녀는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핸드백 하나만 달랑 들고 무작정 차씨를 찾아 미국으로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서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3년 뒤 일본 연주회로 서울에 들렀을 때도 전 차마 처가에 못 들어가고 여관에 묵었어요. 밖에서 처음 만나 말 한 마디 못하고는 집까지 차로 바래다 드린 뒤 돌아서려는데 장인께서 한마디 툭 던지시더라구요. '내 등에 업혀라.' 처가는 3층이어서 저 혼자선 올라갈 수 없었거든요." 그때야 비로소 사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이제 그가 할 일은 자신이 받아온 그 많은 사랑을 돌려주는 일이다. 전 세계에 걸친 연주일정과 강의를 병행하는 빡빡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불행에 빠진 이들이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아무리 작고 초라해도 마다 않고 찾아 다닌다. "그 분들이 저의 연주에 행복해 하고 용기를 얻는 것 이상의 기쁨과 보람이 없지요. 언젠가는 한국의 장애 학생들을 위한 기금도 만들고 그들이 좋은 환경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꿈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누구나 살면서 그만한 사랑을 안받아 본 이들이 또 어디 있으랴. 삶이라는 게 어차피 누군가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주고받는 과정이거늘. 다만 사랑을 받았어도 무심히 넘기거나, 그 소중함을 품지 못하는 차이 뿐일 터이다.
차씨의 책은 한번쯤 새겨볼 만한 삶의 잠언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중 한 대목만을 옮긴다. '나는 언제부턴가 고통의 순간이 찾아오면 이 고통이 언제 어떻게 축복으로 돌변할까를 기대한다. 어쩌면 시련은 축복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재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와 보면 자신의 신체장애조차 또 다른 축복이었다고 했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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