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내 고장에선]"독수리 마을" 강원 양구군 현리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내 고장에선]"독수리 마을" 강원 양구군 현리

입력
2003.12.15 00:00
0 0

하루 해는 마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진다. 멀리 군부대의 훈련 총성이 잦아들면 고샅까지 끝간 데 없이 적막해지고, 산자락 이내마저 어둠에 잠기면 산촌의 밤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꽤나 질기게 어스름 빛발을 유지하는데, 산봉우리에 갇혀 밑둥 자른 깔때기 모양으로 닫힌 마을이지만 하늘은 멀리 장백산맥 너머 몽골의 너른 들판 위까지 열려 있는 까닭이겠다. 지난 9일, 마지막 햇살이 구름에 비껴 노을진 강원 양구군 방산면 현리의 하늘 위로 수리들이 까맣게 떠 있었다.현리는 80여 호가 모여 사는 휴전선 중동부 최전방 마을이다.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월남해 눌러앉은 이들이고 보니 일년 가야 누구 하나 알은 체 하며 찾아올 사람도 없다. 그나마 있다면 물 한 방울 안 담고도 댐이라니 댐인 줄 아는 '평화의 댐' 안보관광객이 휑하니 스쳐 지나칠 뿐. 겨울은 더해서 교회당 붉은 십자가와 해마다 이맘때면 내거는 먼지 앉은 오색전구로도 사무치는 외로움을 어쩌지 못하는데, 몇 해 전부터 그 놈의 독수리들이 날아들면서 적으나마 부산을 떨어주는 게 변화라면 변화인 것이다.

주민들이 주려서 탈진한 독수리들을 거둬 먹이는 것도, 그 놈들이 천연기념물(243호)이어서도, 국제적인 멸종위기종이래서도 아니다. 그냥 목숨있는 것들이 찾아와 준 게 반갑고, 고마운 것이다. "저 놈들은 태풍이 와도 구름 위에 올라앉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는 놈 아니래요?" 금강산 유람선이 서는 고성 장진이 고향이라는 이부춘(62)씨의 말. 중앙아시아의 몽골 초원에서 살다가 겨울이면 휴전선 넘어 먼 길 찾아드는 철새라니, 두고 온 고향을 훑어보고 온 그 인연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5년 전(1999년) 이맘때였다. "축사에 나갔더니 독수리 한 마리가 탈진해서 버둥거리고 있는 거요." 소 키우며 농사짓는 박성렬(48)씨는 그 놈을 데려다 고깃점을 먹이며 기운을 북돋워줬고, 직후부터 양구축협에서 비누공장으로 보내는 소 등지방이며 비계 붙은 돼지껍질을 얻어다 서낭골 빼죽봉 아래 빈 들에 흩어주는 일을 시작했던 것인데…. 첫 해 30여 마리이던 것이 이듬해 겨울에는 100여 마리로 늘어나더니 지난 해에는 200여 마리, 올해에는 무려 300여 마리나 찾아오게 된 것이다. 마을 청년들을 주축으로 '독수리 보호회'를 꾸렸고, 11월 중순 독수리가 찾아 들 즈음부터 북쪽으로 되돌아가는 이듬해 2월 말까지 사나흘에 한 번씩 먹잇감을 실어 나르고 있다. 보호회는 들판 귀퉁이에 간이 우리를 만들어두고 간혹 제 몫을 못 찾아먹어 기운을 못차리는 것들이라도 보이면 수용해 별도로 관리도 한다. "어디 가나 못난 놈들이 있잖아요. 지난 해에도 두 마리나 그렇게 살려서 날려 보냈어요."

온 몸이 검어 검은 독수리라 불리는 이 놈들은 무시무시한 이름이나 위용과는 달리 제 먹이를 사냥하지 못한다. 짐승의 썩은 살로만 제 배를 불리고도 날개를 펼치면 족히 2m에 육박한다. 먹이사냥의 긴장감도, 천적에 대한 경계심도 없이 덩치만 키운 놈이 그래도 하늘의 제왕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며 비행하는 꼴이 주민들 성미에 맞을 까닭이 없다. 맨 몸으로 월남해서 송곳 하나 꽂을 땅 없는 타향에 뿌리내려 반 백년을 살아온 이들이다. "저 놈들은 병신 독수리요. 까마구들한테도 쫓겨 다니더라니까." "옛날 독수리는 안 저랬어. 누리끼리 한 게 몸집은 작아도 닭이며 아이들도 팍팍 채갔으니까." "애 채가는 거는 못 봤어도 노루새끼 채가는 건 직접 봤지." 마을회관에서 만난 김귀준(82) 손종면(80) 할아버지의 독수리 지청구가 끝이 없다. 그래서 애당초 젊은 사람들이 독수리 먹이 준다며 나대자 '정신나간 놈들'이라며 혀를 차던 이들이다.

그들이 그랬던 데는 또 까닭이 있는데, 독수리 먹이를 뿌려주기 시작하면서 까마귀들이 수 천 마리씩 기어들어 마을 빈 들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독수리가 있으면 그 사위스런 까마귀가 발을 붙이지 못해야 하는 게 상식인데, 이것은 제 먹이조차 까마귀에게 빼앗기기 일쑤고, 하늘에서도 까마귀들 협공에 쫓겨다니는 공중전까지 연출하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전쟁 나고 아침에는 인민군 밥 해 먹이고, 해거름 때는 국방군 밥 해먹이고 그랬어. 사람 목숨이 파리목숨이었지." 산기슭마다 생때같은 목숨들이 묻히곤 했는데 그 어름에도 마을에는 까마귀가 지천이었다고 했다. "당체 까마구한테도 못이기는 독수리가 독수리야? 뭐가 좋다고 쳐멕여, 멕이기는."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지난 주초에는 마을에서 독수리 환영회가 열렸다. 꺼먹돼지 한 마리를 잡아 굽고, 막걸리며 소주로 마을 잔치를 벌이는 동안 앞 들 벌판에 축협에서 걷어 온 소 등지방과 돼지 껍질 500㎏을 풀었다. 참석자들의 전언에 따르자면 너른 들과 들판보다 너른 하늘이 온통 독수리와 까마귀떼로 뒤덮여 장관을 이뤘다는 것인데, 잔술에 거나해진 마을의 어르신들도 탄성을 지르며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는 후문. 그렇게 주민들이 차츰차츰 마음자리를 내주는 동안 경계심 많은 수리들도 사람들과 친숙해진 것인지 논두렁으로 다가서도 멀뚱멀뚱 바라 볼 뿐, 어지간해서는 도망쳐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금강산에서 발원해 마을을 질러 흐르는 내가 수입천이고, 그 강이 깊어 큰 비가 와도 수해가 없고 가물어도 물 걱정 해본 적 없다는 동네가 현리다. 전하는 말로, 옛적 자리께나 본다는 풍수가 산을 더듬어 내려오다가 기막힌 '창(倉)' 자리라며 탄성을 질렀다는 곳은 군부대가 차지해버렸지만, 그 앞들에서 농사짓는 이부춘(62)씨는 "딴 동네 150∼200평 소출이 100평에서 난다고 한 마지기를 100평으로 치는 땅이요"라고 했다. 그랬거나 말거나 젊은 사람들은 죄 떠나고 마을은 하루가 다르게 허전해지는 추세. "늙은 네들만 남아 적적한데 수리라도 제 집마냥 찾아와 주니 좋잖아요. 저 놈들 덕에 우리 마을도 서울에서 꽤나 알려졌나 봅디다."

/양구=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 독수리 보호회 회장 박성렬씨

검은 독수리 도래지로 마을이 알려지면서 얼마 전 군에서는 마을 어귀에 안내 표지판을 내걸었다. 주민들의 말처럼 마을이 제법 유명해지면서 사진 찍는 이들이며 조류 동호회 회원들이 심심찮게 마을을 찾아 드는 추세라고 했다.

"지난 해부터 군에서도 보호회 활동비조로 몇 백만원의 돈을 보태줍디다. 이제는 그만두고 싶어도 못하게 됐어요." 독수리와 처음 인연을 맺은 빚으로 독수리보호회 회장을 맡은 박성렬(사진)씨. 까마귀떼 등쌀에 우사의 소 사료 챙기기가 힘들어졌지만, 사정이 이러고 보니 이제는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 했다.

회원들은 폭설에 찻길이 끊기지 않는 한 읍내로 나가 독수리 먹잇감을 구해온다. 지난 달에는 군에서 나온 돈으로 거금 250만원을 들여 고기 분쇄기도 사들였다고 했다.

"유리로 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는 탐조대를 하나 지어야겠어요. 거기다 망원경 몇 대 구해 놓을 수 있으면 더 좋겠고." 독수리 보자며 마을을 찾아오는 탐조객들에게 적으나마 편의를 제공하자는 취지다. 아직은 독수리를 관광 소득원으로 활용해보자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고 한다.

강원도 바다쪽 고장들과 달리 내륙으로 통하는 길은 아직도 험하고 멀어 많은 이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차츰차츰 마을이 알려지면 서울 가락동 시장에서라도 알은 체 해주는 이들이 있을 테고, 그러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게 주민들의 생각인 듯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