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모자라서 난리인데, 염치도 없이…" 산업용 기계제어 장치를 개발하는 K사의 정경호(49·가명) 사장은 요즘 빗발치는 지인(知人)들의 청탁성 전화에 몸살이 날 지경이다. 이들의 부탁은 하나같이 '우리 아들을 병역특례로 채용해 달라'는 것. 병역특례란 각종 기술 자격증이 있는 현역입영대상자가 군대에 가는 대신 K사 같은 중소벤처업체에서 연구 혹은 기능직으로 36개월간 근무해 병역을 면제 받는 제도다.정 사장은 "능력있는 기술자 한 사람이 아쉬운 실정에 남의 부탁 들어줄 처지가 못 된다"면서도 이들의 간곡한 요청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난감해 했다.
산업기능요원, 연구기능요원 등 병역특례 제도가 축소되면서 병역특례 벤처업체마다 청탁 파동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달 말 2명의 병역특례 요원을 뽑을 계획인 K사는 10일까지 13명으로부터 청탁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이들 간에도 경쟁률이 6대 1이 넘는 셈. 대부분 경영진의 친인척이나 사업상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부탁을 해온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중앙부처 공무원, 대학병원 의사, 대기업 임원, 대학 교수, 언론인 등 소위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도 병역특례를 둘러싼 청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과거에는 일부 기업의 젊은 경영진들이 스스로 병역특례 지정을 받는다거나, 유사한 방법으로 친인척의 자제를 입사시키기 위해 은밀한 청탁이 오가곤 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병역특례가 합법적인 입영기피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최근 청탁의 수위는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는 정부가 20대 남성 인구 감소에 따른 군 인력 자원 부족을 이유로 2005년까지 병역특례제도를 점진적으로 폐지키로 하면서 병역특례에 대한 가수요가 몰렸기 때문이다. 제도 축소는 이미 지난해부터 시작돼 2002년 1만7,000명에 달했던 특례 인원은 올해 8,500명으로, 내년에는 4,000명 이하로 줄어들 전망이다.
이래저래 '막차'를 타려는 일부 젊은이들의 안달에 어긋난 부모의 정이 가세해 기업들만 괴롭다. 일부 부모들은 '월급은 필요 없으니 채용만 시켜달라'고 읍소하거나, 대형 거래처와의 인맥을 과시하며 압력을 넣기도 한다. 한 벤처 경영인은 "사장들끼리 모여 청탁자들의 명단을 뽑아보면서 누가 '총대'를 멜지 논의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병역특례 제도는 중소벤처에 젊고 능력있는 인재를 제공해 왔다"며 "제도 축소·폐지로 업계 인력난이 극심해진 와중에 채용 청탁까지 몰려드니 죽을 맛"이라고 말했다. 청탁으로 별 능력 없는 사람을 뽑아봐야 회사 분위기만 해치는데, 힘있는 사람들의 청탁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어 고민이란 설명이다.
병역특례요원은 현재 1만5,000여개 업체에 8만여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이중 산업기능요원들은 5인 이상 중소기업 생산직 근로자의 6.1%를 차지할 만큼 인력난 해소에 기여하고 있다. 30명 미만 생산직 업체의 경우 20%가량이 산업기능요원이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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