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 30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가톨릭 상지회관에서 60여명의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모여 '민주화운동(전국)청년연합(약칭 민청련)' 결성식을 가졌다. 72년 유신 이후 민주화운동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표방하고 나선 청년단체의 출범이었다. 결성식(총회)은 당초 오후 7시 30분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당국이 경찰력을 동원하여 회의장을 봉쇄하는 바람에 밤 9시 쯤에야 가까스로 시작됐다. 이날 아침부터 총회 참석이 예상되는 수십명의 청년들이 자택에서 연금되거나 시내 각 경찰서로 불려갔으며, 상지회관 주변에서도 총회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150여명이 경찰서로 연행됐다. 창립선언문은 총회의 성격과 관련, '오늘의 이 모임은 지난 20여년간에 걸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통해 성장 발전해 온 운동역량의 값진 결실이며, 특히 저 80년 5월의 피맺힌 민중항쟁에서 솟아오르는 운동역량의 결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민청련은 총회에서 집행위원회 의장에 김근태(金槿泰·56·열린우리당 대표·이하 현직)씨, 부의장에 장영달(張永達·55·국회의원)씨, 집행위원에 박계동(朴啓東·50·전 국회의원) 박우섭(朴祐燮·48·인천 남구청장) 연성수(延聖洙·48·두레민족생활문화원장)씨 등을 선출했다.민청련은 공식적 대표성을 갖는 집행위원회와 함께 비공개 된 상임위원회를 두었다. 상임위 의장에 최민화(崔敏和·54·(주)APSUN테크놀로지 경영고문)씨, 부의장에 이해찬(李海瓚·51·국회의원)씨가 임명됐다. 결성식이 끝난 뒤 참석자 모두가 경찰서와 안기부로 연행됐다. 대부분 조사를 받고 하루이틀 만에 나왔지만 김 의장은 일주일 후에야 석방됐다. 김 의장의 석방은 민청련의 입장에서 볼 때 공개적인 운동 단체를 합법적으로 쟁취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민청련은 종로구 인사동 파고다 빌딩 504호실에 사무실을 얻어 10월 29일 오후 2시 회원 1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습적인 현판식을 가졌다. 이 사실을 몰랐던 당국은 크게 당혹해 했다. 경찰은 11월 7일부터 일주일 동안 사무실을 점거해 집기를 모두 내동댕이 치고 현판을 떼어낸 뒤 출입문을 봉쇄했다. 민청련 집행위와 상임위 간부의 부인 등 여성회원들을 중심으로 사무실 고수에 나섰고, 결국 경찰은 '철저한 감시와 잠복근무'로 방침을 선회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 부재를 표면적 유화책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특히 민청련 결성식은 버마 아웅산 사건(10월 9일)을 불렀던 전 대통령의 아시아 6개국 순방을 앞둔 시점에 이뤄졌고, 사무실을 연 시기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초청(11월 12일)이 겨우 성사된 상황이었다. 레이건 대통령 방한을 전후해 구속학생 석방과 제적학생 복학 조치가 내려졌을 정도였다.
서울 한 복판에 최초로 반(半)합법적 공개적 정치투쟁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민청련은 살신성인의 상징인 두꺼비 그림을 사무실에 내걸었다. 민청련 집행위원이었던 연성수씨의 부인 이기연(李起淵·46·(주)질경이우리옷 대표)씨의 설명. "4·19와 동학혁명의 정신이 들어있는 상징화를 만들기로 하고 미술을 전공한(홍익대 조소과 76학번) 내가 그 일을 맡았다. 남편과 궁리 끝에 두꺼비를 찾아냈다. 두꺼비는 새끼를 낳을 때면 일부러 뱀에게 싸움을 걸어 잡혀 먹힌다. 자신은 죽지만 뱀 역시 두꺼비의 독으로 죽게 된다. 뱀의 배 속에서 알을 까고 나온 새끼들은 뱀을 먹어치우며 자라난다.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는 당시의 우리 각오를 표현한 것이었다. 동학농민 노동자 독립군이 둘러싸고 있는 두꺼비를 탱크처럼 그렸다. 8절지 크기로 목판을 만들어 인쇄했다. 이후 많은 동지들이 잡혀 갔을 때는 옴두꺼비를 그렸다. 조그만 옴두꺼비는 적을 만나면 꾹꾹 울퉁불퉁 부풀어서 아무도 만질 수 없을 만큼 크고 흉측한 모습이 된다. 감옥에 있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이 두꺼비들은 이후 87년 6월 항쟁 때까지 우리가 움직이는 곳에는 어디든 따라다녔다."
민청련은 5·18광주사태진상규명특별위원회 발족을 시작으로 이후 80년대 모든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광주특위 위원장이었던 최민화씨의 회고. "아무도 공개적으로 광주를 거론하지 못했던 84년 5월 13일 우리는 '5·18 추모제'를 계획했다. 극비리에 300여명의 회원이 영등포산업선교회 대강당에 모였다. 그때 서울대 이애주 교수가 처음으로 살풀이춤을 추었다. 이 교수의 살풀이춤은 이후 민주화 운동의 또다른 상징이 됐고, 87년 6월 항쟁 때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 중 일부는 그날 밤 행사를 마치고 자정이 넘어 대절한 버스로 광주로 내려갔다. 14일 낮 해직교수와 종교인 등과 함께 60여명이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다. 이어 금남로를 행진하며 '오월의 노래'를 불렀다. 이 역시 이후 각종 단체나 대학생들이 공개적으로 망월동 묘소를 참배하는 효시가 됐다."
민청련 재정은 대부분 회원들의 갹출로 이뤄졌다. 대학 학번별로 책임자를 선정해 회원을 모았으며 회원은 수입의 20분의 1을 '민주화 비용'으로 내도록 권유 받았다. 초창기 회원은 200∼300명 정도였으나 그 수는 1,300∼1,500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87년 6월 항쟁 당시 '정장을 하고 시위에 참가하라'는 민청련 지도부의 지침을 지켜 이른바 '넥타이 부대'를 형성했고, 일반 시민들을 동참케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민청련은 93년 10월 28일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갖고 공식적인 해체를 선언했다. 이후 이들은 민청련동지회(회장 권형택)를 결성, '새끼 두꺼비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
정병진편집위원 bjjung@hk.co.kr
■ 상임위 초대의장 최민화씨
1980년 4월 소위 '서울의 봄'을 맞아 나는 연세대(신학과 69학번)에 3학년으로 복학했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된 이후 1년만에 복학으로 처리되었으나 당국의 불허 방침과 등교 방해로 다시 제적된 후 5년만에 또다시 복학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3번이나 실형을 선고받고 교도소 생활을 했다. 나는 81년 4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출판부장이라는 직장을 얻었다.
83년 봄 학기에 들어서자 전국의 대학가와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전두환 체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5·18과 관련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던 김대중씨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강제 출국(82년 12월 23일에는)한 뒤였다. 5월 18일에는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김영삼씨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각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그 동안 청년운동을 주도해 왔던 60∼70년대 학생운동 출신자들 사이에서는 공개적인 투쟁 조직을 만들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대부분 민청학련이나 긴급조치9호와 관련해 감옥에 다녀왔거나 피신 중이었던 동지들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그해 5월 하순부터 우리집에서 김경남(목사·이하 현직) 문국주(민주재단 사무총장) 송진섭(안산시장) 이해찬 장영달 정문화(작고) 정화영(사업) 조성우(민화협 사무총장) 황인성(사회운동) 등 60년대 후반 학번에서 72학번까지 학생운동을 주도해 온 동지들과 매주 1차례씩 비밀모임을 갖고 공개적인 '청년단체'의 결성을 논의했다. 이범영(작고) 박우섭 박계동 연성수 등 72학번부터 70년대 후반 학번까지 학생운동을 주도해 온 이들은 별도로 모임을 갖고 같은 논의를 진행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집 모임은 OB, 후배들 모임은 YB로 불리웠다. OB모임인 72학번(서울대 사회학과) 이해찬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돌베개출판사의 사무실을 YB쪽의 아지트로 제공하면서 양쪽의 교량 역을 맡고 있었다. 나중에 민청련이 출범했을 때 YB쪽이 공개적인 집행위원회에, OB쪽이 비선(秘線)조직인 상임위원회에 주로 포진하게 된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결성 시기만 남겨놓게 되자 우리는 조직을 보호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방안을 모색했다. 우리는 공안당국이 주시해도 좋을 만한 공식적인 발대식을 계획했다. 8월 15일 경기 연천군 동막계곡에서 '운동권 출신 동지들의 야유회'를 가졌다. 청년단체가 공개되는 순간 당국은 모든 임원과 회원들을 연행해서 조사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우리의 진술을 철저하게 통일할 필요가 있었다. 이틀 뒤인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의 8주기 추모 모임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경기 포천군 약사봉에서 열렸다. 이날 OB와 YB의 핵심 멤버 대부분이 모였다. 곧 발족시킬 청년단체의 대표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우리는 크게 현장운동파와 정치투쟁파로 나뉘어 있었다. 양측 모두 기꺼이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로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김근태 선배가 지목됐다. 나는 인천으로 김 선배를 찾아가 새로 태어날 청년단체를 이끌어 줄 것을 요청했다. 김 선배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세번째 찾아갔을 때 결심을 세웠다. 삼고초려 끝에 대표를 모신 우리는 그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틀을 짰다.
민청련은 군강제징집 희생자 조사 보고대회, 학원안정법제정 반대투쟁, 직선제 개헌투쟁 등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또 민청련 창립 이후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를 만들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창립대회까지 무사히 치러 본격적인 재야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민청련은 두꺼비가 뱀 앞에서 나 잡아 먹어 보라고 집요하게 대들듯이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나는 85년 10월 2일 저녁 부인이 운영하는 약국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사형수에게 씌우는 용수 같은 것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끌려간 곳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비슷한 시기 민청련 간부 대부분이 그곳으로 잡혀왔다. 드디어 뱀이 두꺼비를 삼킨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