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릉에 다녀왔다. 공연이 끝나고 곧바로 다른 작품 연습에 들어간 터라 시간에 쫓기는 와중에 나 몰라라 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래 전에 약속이 된 여행이어서 바쁘다는 건 핑계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가 참으로 어이없다.박정자 선생과 함께 공연을 할 때였는데 분장을 하다 말고 나도 모르게 "바다가 보고 싶다"고 중얼거린 것이다. 어쩌자고 혼자 생각이 입 밖에 튀어나온 것인지….
머쓱해져서 열심히 분장을 하는데 느닷없이 박 선생이 친한 친구 있느냐고 물으셨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내게 박 선생은 "그럼 그 친구와 00월 00일 0시에 어디 어디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바다 보고 싶다며? 바다 보여줄 게" 하시는 것이었다.
몸만 오면 된다는 박 선생의 말만 믿고 달랑 손가방 하나 들고 따라 나서서 가게 된 곳이 바로 강릉에 있는 참소리 박물관이었다. 세계 각지를 돌며 모아온 희귀 음반에 갖가지 축음기들, 거기에 에디슨의 발명품부터 유품까지….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귀한 것들을 수집하느라 들인 공이 얼마일까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축음기를 돌려가며 귀한 음반으로 음악감상까지 마치고 으르렁거리는 밤바다를 마주하니 묘한 감격에 가슴이 뻐근해 왔다. 그러다가 문득 나이가 든다는건 어쩌면 멋진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장실에서 까마득한 후배의 혼잣말을 듣고 챙겨줄 수 있는 그 여유. 바쁜 시간을 쪼개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찾아 다닐 수 있는 그 넉넉함이 나이가 더 들면 내게도 찾아와 주지 않을까 하는 염치없는 바람을 가져본다.
길 해 연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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