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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5> 허균 vs 권필-반역과 항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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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5> 허균 vs 권필-반역과 항거 사이

입력
2003.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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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 4월7일 함경도 경원 유배길에 오르려던 권필(權 □)이 세상을 떴다. 국가 권력에 빌붙어 권세를 부리던 외척 유희분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는 혐의로 광해군의 친국(親鞫·임금이 직접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 아래 혹독한 형벌을 받은 직후였다. 들것에 실려 동대문 밖으로 나왔다가 친구들에게 막걸리를 청해 마셨는데 장독이 올라 이튿날 죽음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6년 여의 세월이 흐른 1618년 8월26일, 서울의 서쪽 저자거리에서 허균(許筠)이 처형됐다. 본인이 승복하지 않아 마지막 판결문도 없었지만 역모죄로 다스려진 까닭에 그의 머리는 막대에 매달려 거리에 내걸렸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고, 절친한 벗이었으며, 당대의 탁월한 시인이었다. 비극적 최후가 말해 주듯 횡포한 봉건 지배체제로부터 가혹하게 제거됐다는 점도 비슷했다. 행적과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은 누구보다 체제의 아웃사이더 또는 저항인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음이 분명하다.천 개의 얼굴과 반역의 삶, 허균

'예교(禮敎)에 어찌 묶이고 놓임을 당하겠는가(禮敎寧拘放)/ 부침(浮沈)을 다만 정(情)에 맡길 뿐이라네(浮沈只任情)/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君須用君法)/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려네(吾自達吾生)' ―'벼슬에서 파직됐다는 소리를 듣고(聞罷官作)'

관청에서 부처를 받들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면된 허균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시이다. 그의 뜻은 예교에 속박되지 않고 정의 이끎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예교란 무엇인가? 삼강오륜으로 규범이 된 조선 제일의 윤리도덕이며 절대 복종만이 요구되던 불변의 당위이다. 하지만 허균은 통념적 도덕률에 굴종하기보다는 본성과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자기 방식의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이때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이단으로 간주됐지만 그는 불교에 심취했고, 도교에 빠져드는가 하면, 양명학 좌파를 넘나들었고, 서학을 수입했다.

양천 허씨 명문가의 막내로 태어나 문명을 날리던 허균이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20대 전반기에 겪은 가족사의 비극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아껴주던 형님 허봉의 정치적 좌절과 죽음, 누이 허난설헌의 요절, 임진왜란의 피란길에서 당한 아내와 아들의 죽음 등 큰 충격을 연속으로 겪었다.

하지만 이미 크고 작은 민란이 발생한 데서 알 수 있듯 허균은 당시 조선시대 체제의 모순에 더 근원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적서차별의 신분 모순과 백성들의 황폐한 삶, 피비린내 나는 당쟁 등에 대한 허균의 비판적 인식은 그의 수많은 시 작품과 '호민론' '유재론'과 같은 산문, '홍길동전' 같은 소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표준이나 중심을 거부하는 사람의 삶에서는 자유와 개성의 향기가 뚜렷하다. 허균은 서얼이나 천민 등이 지닌 재능을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했으며 그만큼 그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한 이들과의 사귐도 도타워서 넉넉지 않은 월급을 쪼개서 생계를 몸소 돕기도 했다.

허균의 혁명적 사고는 이런 휴머니즘의 실천과정에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행동은 종종 예측하기 어렵고 괴상하기까지 한데 특히 만년의 정치적 선택이 그러하다. 광해조의 거물 이이첨과 제휴하여 대북파(大北派·선조 때 북인 중에서 홍여순 등이 남이공 등의 소북에 대립해 이룬 당파)에 참여하고 폐모론(廢母論·선조의 왕비이며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비하자는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 등의 주장)을 주창한 데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며, 역모 사건에 대해서도 시빗거리가 남아 있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허균은 역적이었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참으로 다양했다. 체제의 이편에서는 '천지간의 한 괴물'로, '성품이 올빼미 같고 행실은 개와 돼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그가 중세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뚜렷한 개성과 다양성을 지닌 천의 얼굴의 소유자였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비판적 지성과 풍자의 정신, 권필

'궁궐 버들 푸르고 꽃잎 어지러이 날리는데(宮柳靑靑花亂飛)/ 성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떠네(滿城冠蓋媚春暉)/ 조정에선 입 모아 승평의 즐거움 하례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 누가 포의(벼슬없는 선비)의 입에서 위태로운 말이 나오게 했나(誰遣危言出布衣)' ―'임숙영의 삭과 소식을 듣고(聞任茂叔削科)'

1611년에 재야 선비 임숙영이 전시(殿試·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왕실 외척의 교만함과 왕비의 정사 관여를 문제 삼는 글을 지었다. 이를 본 광해군이 대로하여 방(榜)에서 그의 이름을 빼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권필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즉시 그 일을 풍자하여 지은 시가 바로 이 '궁류시(宮柳詩)'이다. 그리고 이 시 한 편 때문에 권필은 결국 죽음으로 내몰렸다. '궁궐 버들'은 유희분 등의 외척 유씨, '봄볕'은 광해군, '포의'는 책문을 쓴 임숙영에 대응된다. 이렇게 보면 궁정의 봄 풍경에 빗댄 권력과 그 주변 아첨꾼들의 행태가 우스꽝스럽게 드러난다.

권필의 사상은 허균처럼 체제 전복적이거나 일탈적인 정도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중년에 그는 강화도에 머물면서 성리학의 연원과 도통을 살핀 저술을 남기기도 하고, 성리학적 수양에 더욱 침잠하기도 했다. 그의 사유는 때때로 탈주를 꿈꾸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체제 수호적이다. 그러나 항상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는데 이는 청소년기의 독특한 가정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의 부친 권벽은 여러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는 등 오랫동안 사관을 지냈는데 절친한 벗이 직무와 관련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하는 중에도 평생 남과의 교유를 끊고 폐쇄적 삶을 살았다. 세상에 말없이 항의하며 침울하게 살아간 아버지, 불의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는 형들 아래 권필은 강인한 비판적 지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보다 존경했던 스승 정철이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이산해 등 동인 세력의 모략으로 귀양길에 오르자 권필은 정계에 환멸을 느끼고 입신출세의 길을 아주 접어버린다. 이후 방랑의 시절을 보내며 전란으로 유린된 강토와 백성들의 찢긴 삶을 직접 눈으로 보고 지배계급에 풍자의 비수를 겨누는 시적 태도를 유지했다. 탐욕스러운 세도가의 신도비(神道碑·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를 세우기 위해 파헤쳐지는 돌과 그것을 나르는 민중의 노역을 묘사한 '충주석(忠州石)', 당쟁을 뼈다귀를 놓고 싸우는 개들에 빗댄 '투구행(鬪狗行)' 등은 사회 모순을 포착, 현실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빼어난 작품들이다.

삶의 질곡과 낭만적 해결의 두 방식

허균과 권필은 당대의 빼어난 시인일 뿐만 아니라 고전소설사에서도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는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허균의 대표 소설은 '홍길동전'이며, 권필의 대표작은 '주생전(周生傳)'이다. 중세적 삶의 질곡과 그 해결을 향한 낭만적 상상력을 담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주제와 형상화 방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홍길동전'은 16세기 연산조에 실재했던 농민저항 지도자 홍길동을 소재로 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의 실현이라는 중심주제를 담고,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며 신분차별을 극복하는 민중적 영웅상을 낭만적으로 구현했다. 율도국의 건설, 즉 유토피아적 이상사회 건설로 끝나는 이 소설은 당대 모순을 해결하는 주된 동력으로 민중의 저항적 에네르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주생전'은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전기소설의 형식에 담은 작품이다. 임진왜란 때 만난 명 나라 군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주생, 배도, 선화라는 세 남녀가 벌이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애정 갈등과 죽음, 그리고 조선 출병으로 인한 기약 없는 이별 등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비극적 삶의 과정을 낭만적 상상력으로 펼쳐낸 것이다.

허균이 신분갈등이라는 사회적 주제를 가지고 정공법으로 더 나은 삶을 설계했다면, 권필은 애정갈등이라는 남녀간의 문제를 통해 다분히 우회적으로 현실 삶의 불안을 떨쳐내려 했다. 주제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는 속박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 형 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허 균

1569년(선조 2년)에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1618년(광해 10년)에 역모죄로 서울 서쪽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됐다. 손곡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26세 이후 벼슬길에 들었으나 불도를 숭상한다는 등의 이유로 자주 탄핵을 받았다. 불교, 도교, 양명학 등에도 밝았고 서얼·천민과도 교류, 현실비판적인 시문과 체제 저항적인 산문 및 소설을 남겼다.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과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 시문집 '성소부부고' 등이 전한다.

권 필

1569년(선조 2년)에 서울 마포의 현석촌에서 태어나 1612년(광해 4년)에 동대문 밖에서 죽었다. 정철의 문인이며 허균과도 절친했다. 신묘당사(辛卯黨事·1591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벌어진 동인의 서인 탄압)로 정철이 유배되는 것을 보고 정계의 뜻을 접고 다시는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훗날 벼슬 없는 선비로 원접행차에 시나 글을 짓는 제술관(製述官)으로 발탁돼 이름을 떨쳤으나, 평생 벼슬하지 않고 풍자적 저항시인으로 살았다. '주생전' 등의 소설과 '석주집(石洲集)'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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