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 줄 최고의 고고학적 자료다."10일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백제고분 현장 설명회에 참석한 문화재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밝힌 말이다.
이번 발굴을 주도한 이훈 조사위원은 "무령왕릉 발굴 이후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 중요한 유물이 가장 많이 나온 데다 무덤마다 구조와 형태, 조성 시기(4세기 후반∼5세기 초중반)가 서로 다르고 다양한 토기까지 다량 출토돼 기존 유물과 비교해 백제사의 편년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6기의 무덤 가운데서도 1호분과 4호분은 각각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환두대도, 허리띠, 중국 자기 등 화려한 유물을 모두 갖추고 있어 가장 신분이 높았던 사람의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또 여성 무덤으로 추정되는 2호분에서는 금제 귀고리와 구슬, 머리 위 부분을 치장하는 붉은 빛의 작은 구슬, 목걸이 등이 본래 놓였던 모습 그대로 확인돼 백제 시대 귀부인의 머리 치장 등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화려한 유물을 부장하고 무덤을 쓸 만큼 강력한 세력이 이 지역에 존재했으며, 이들 세력이 한성 백제의 중앙 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7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성이 함락된 뒤 백제가 한 달 만에 급히 웅진으로 천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세력의 존재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토착세력인지, 아니면 한성 백제가 지방에 파견한 왕족이나 귀족이었는지는 여전한 논란 거리로 남아있다. 이 문제는 한성 백제 시대 중앙과 지방의 권력 관계, 통치 방식을 가름하는 중요한 쟁점이기도 하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백제는 전국에 22개 담로(중앙에서 파견한 지방 장관)를 두어 지방을 지배했다. 그런데 담로제 정착 시기에 대해 근초고왕(재위346∼375년) 연간이라는 주장과 웅진 천도 이후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수촌리 백제고분군의 무덤 주인이 토착민 유력자냐, 아니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냐에 따라, 또 그가 한성 백제의 중앙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활동했느냐에 따라 한성 백제 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계, 지방통치 방식(직접통치냐 간접통치냐) 등이 규명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발굴에서 나온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의 형태가 일본의 백제계 고분 출토물과 유사한 점도 흥미롭다. 한종섭 백제문화연구회 공동대표는 "이번에 나온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은 일본의 백제계 고분인 규슈(九州) 구마모토(熊本)의 구니야마 고분, 나라의 후지노키 고분 출토물과 유사하다"며 "이들 유물이 중앙 권력이 내리는 위세품임을 감안할 때 일본 내 이들 지역의 지배자가 백제의 지방 장관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추정했다.
어디에 주목하든 전문가들은 이번 수촌리 백제고분군은 웅진 천도 이전에 한성 백제의 지배력이 이미 이 일대에 미쳤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물증인 것으로 보고 있다.
/공주=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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