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소년이 병으로 숨진 어머니 곁에서 몇 달을 홀로 지내다 발견된 사건은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저마다 놀라고 괴이하게 여긴 사건의 원인과 책임 등을 또렷하게 분별하기 어려운 것에 당혹해 하는 모습이다. 가정적 불행과 소외에서 비롯된 소년의 이상심리를 나름대로 헤아리다가 이웃과 사회의 무관심을 탓하고 자책하지만, 소년과 사회가 함께 앓는 병의 정체는 여전히 어렴풋한 것이다. 소년의 처지가 못내 안타까워 도움을 주려는 이들이 많은 사회에서, 소년 자신과 담임교사 등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득한 혼돈의 단면이다.■ 소년의 사연을 듣는 순간 서스펜스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 고전 '사이코'를 언뜻 떠올렸다. 가난과 소외 등의 각박한 현실에 비춰봐도 엽기적인 이상행동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도착(倒錯)적 애증과 집착으로 짜인 영화의 설정과 닮았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영화의 범죄적 요소나 주인공의 분열적 이중인격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머니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다"는 소년의 말은 영화 속보다 훨씬 절실하고 눈물겨운 토로로 들렸다. 그래서인지 소년을 향한 온갖 관심과 배려 가운데, 정신치료를 해줘야 한다는 얘기가 무엇보다 가슴 아프면서도 반가웠다.
■ 그러나 이 사회는 소년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당장 살 곳과 먹을 것을 배려하는 대증요법에 매달려 한동안 분주하다 말 것이다. 소년에 대한 연민과 동정과 후원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일상적 복지를 돌보는 것만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 잠재한 비극의 근원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모든 것을 불운한 개인과 각박한 세태 탓으로 돌리면서 너그러운 사회적 온정을 모으는 관행은 오히려 개인과 사회의 병을 깊고 넓게 하는 측면마저 있다. 개인과 사회의 실패에서 비롯된 비극적 현상을 다시 개인과 사회의 선의에 의존해 막겠다는 것은 문제의 근본을 외면한 무지이거나 위선이다.
■ 이 사건에서 발견하는 유일한 희망은 사회의 온정이 아니다. 국가와 학교 등 공적 제도가 그나마 소년의 생존을 지탱하고 관심을 기울인 사실이다. 정글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 공동체의 평화와 정의를 이루는 것은 국가의 적극적 역할뿐이라는 상식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오래 전 구현한 서구사회라면 소년과 같은 참담한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치에도 불구하고, 이웃돕기 성금모금에 앞장서면서도 국가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한 세금을 올린다면 가로막고 나서는 무리가 횡행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그런 의식과 심리가 사이코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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