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시 가불하지 않기로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또 그날이 돌아왔다. 문제는 친구와 술 때문이다. 고향친구, 회사친구, 동창생…. 객지에서 낙이란 게 친구 만나고 술 마시는 것이었다. 젊은 청춘이 고상한 취미생활도 즐겨볼 만도 한데 그렇게 하질 못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월급봉투를 손에 쥐기란 남의 이야기였다.드디어 친구놈들과의 지겨운 술자리를 끝장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흔히 말하는 데이트를 즐겼고 폼도 제법 내봤다. 그렇잖아도 매달 계속되는 가불 인생살이 청산하고 장가밑천 적금도 빨리 들어야겠다고 작심하던 차였다. 그러나 가불인생에 한계가 왔다. 1983년 나의 자화상이다.
결국 해외근무를 택했다. 그것도 열사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로. 장가밑천 마련해 사귀던 여자와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였다. 친구와 술로 젊은 시절을 허공에 날려버린 나로서는 2년간 혹독한 환경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처로, 또 새로운 인생의 기회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출발 일주일전 친구 녀석들과의 송별식이 또 문제였다. 인근 불량배들과의 사소한 시비가 패싸움으로 번져 결국 어깨 탈골로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다. 의사 선생은 오른 팔 전체를 깁스하고 2개월동안 꼼짝 말라고 했다.
하지만 여자친구와 가족들의 해외근무를 포기하라는 완고한 만류를 뒤로한 채 예정대로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아침에 깁스를 혼자 풀어버린 뒤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탑승 수속한 게 무리였는지 김포공항 상공도 벗어나기도 전에 어깨가 퉁퉁 붓고 쑤셔 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40∼5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열악한 건설현장의 숨가쁨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된다.
밤새 얼음찜질로 퉁퉁 부은 팔을 진정시키기를 한달 보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큰 좌절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자신과 용기는 젊음의 패기라기 보다는 선배 동료들의 절대적인 도움 때문이었다.
방콕에서 온 탐닌, 필리핀에서 온 아르니, 이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눈이 유난히 큰 스리랑카 아저씨 등. 우리 건설현장에서 고용한 로컬 노동자들은 건축자재관리 업무를 맡았던 나에게 헌신적인 협조와 인간적 동료애를 보여주었다.
업무파악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한쪽 팔의 거동도 어려웠던 입장인데 지시하기 이전에 본인들이 솔선 수범하여 작업을 일찍 시작해 이전보다 훨씬 좋은 실적을 냈다. 건강한 몸으로 와도 어려운 현장에 불편한 몸을 숨기고 왔으니, 상사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탐닌과 아르니가 알고 나를 위로하며 정성껏 도운 것이다.
고용허가제 실시를 앞두고 해외 이주노동자들이 강제 추방되고 있다. 80년대 중동에서 같이 일했던 동남아 노동자들은 대한민국을 정말 잘 이해한다. 그들의 정을 평생 잊을 수 없는 나로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성 태 한국노총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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