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죽음이 눈 앞에 닥쳐야 비로소 신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눈에 보이는 것, 또는 이제껏 세상의 전부로 여겼던 나 자신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홍식(52) 연세대 정신건강병원장이 허 근(가톨릭 알코올 사목센터 소장) 신부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1985년 이 원장은 부친의 간암 투병을 지켜보아야 했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명문대 의사였지만, 이제까지 배웠던 지식과 의술로는 극심한 통증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아버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교가 있으면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이 편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무신론자였던 아버지는 여러 종교 중 제사와 술, 담배를 허용한다는 이유로 가톨릭에 관심을 보였다. 집 근처 강동구 길동 성당으로 무작정 신부를 찾아갔다. 항상 남이 찾아오기만 하다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니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길동 성당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허 신부는 이내 이 원장의 사연에 귀와 마음을 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격 없는 대화가 이루어졌다. 절차는 간소화하자고 했다. "신부님이 그렇게 편하게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제 자존심에 그냥 돌아가고 말았을 겁니다." 허 신부는 아픈 부친을 위해 집을 방문했고 바쁜 이 원장에게는 통신교리로 영세를 주었다. 9개월 뒤 아버지는 편안한 얼굴로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 원장은 허 신부와의 만남을 통해 정신과 의사인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신부님은 아무 보수 없이도 저렇게 남을 돕는데, 의사인 나는 환자에 대한 서비스가 이게 무언가" 싶었다. 또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낫게 할 수 있는 것은 100중 20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마음도 갖게 되었다. 나머지는 종교와 그 밖의 것들의 몫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환자에게 종교를 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의사가 못하는 걸 성직자들이 해준다면 그것도 받아들여야지요." 이 원장은 허 신부의 일이라면 틈틈이 고해성사를 해오는 신도들의 정신과적 치료에 대해 자문을 해주는 것 말고도 무엇이든 도와주겠다고 생각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98년 허 신부가 알코올 중독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알코올 사목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허 신부는 이 원장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자신이 한 때 한 번에 소주 8병, 맥주 24병을 먹을 정도로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겨우 단주했다는 것이었다. 놀랐지만 한편 반가웠다. "정신과 의사로서 알코올 중독이 얼마나 심각한 질환인지 알기 때문이죠" 그래도 술을 끊지 않고도 끊었다고 거짓말 하는 환자들을 수없이 본 터라 허 신부를 술집으로 데려가 끝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믿었다. 이 원장은 지금도 허 신부가 운영하는 알코올 중독 프로그램에서 직접 강의를 하기도 하고, 주제에 맞는 의사를 추천해 주기도 한다. 반대로 허 신부가 연세대 정신건강 병원에서 강의를 할 때도 있다.
두 사람은 알코올 중독은 의학과 종교적 치료를 병행하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데 뜻을 같이 한다. 이 원장은 언젠가 허 신부와 함께 알코올 중독 치료 전문 병원을 만들어 볼 생각도 있다. 20년 전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깨달은 의술과 종교의 만남을 더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신부와 신자로 만났지만, 이제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남은 생을 함께 하고픈 인연이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