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 전에 독자여러분께 먼저 묻고 싶다. 충무로 1가 24번지에 자리잡고 있던 카페 떼아뜨르를 아시느냐고. 우리나라 최초의 소극장이란 딱딱한 수식어를 굳이 끄집어 내고 싶진 않다. 낮에는 카페로 차를 팔고 밤이면 테이블에 둘러 앉아 연극을 보던 거기. 고작 70명 남짓하게 앉아서 웃고 또 울었던 그 공간은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늘 따뜻했고 아름다웠으니까. 당대 서울의 내로라 하는 멋쟁이들이나 엘리트들에게 늘 사랑 받았던 그곳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카페'라는 이름조차 낯설던시절 떼아뜨르는 순전히 한 인간의 노력으로 태어났다. 무대 미술의 대모인 이병복 선생이 바로 그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결혼 반지를 팔고 여기저기서 마련해 온 돈으로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병복 선생의 부군이신 권옥연 선생도 덩달아 까페 자리를 알아 보기 위해 복덕방을 찾아 다녔다. 맙소사, 한국의 으뜸가는 서양 화가가 복덕방이라니.
그렇게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카페 떼아뜨르는 1969년 4월1일 '세계연극인의 날'에 맞춰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떼아뜨르에서 처음 가진 공연은 김정옥 연출의 '대머리 여가수'였다.
그런데 잠깐, '대머리 여가수'에 대해 사람들이 늘 궁금해 하는 것이 있다. '대머리 여가수'에 진짜 대머리 여가수가 나올까?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인 '대머리 여가수'는 스미스와 마틴 등 두 쌍의 부부가 등장해 일상생활 속에 파묻힌 부부생활의 무의미함, 그리고 인간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이상, 정답은 다음에 있을 '대머리 여가수' 공연을 위해 남겨두기로 하자. 대머리가 나오든 안 나오든, 떼아뜨르에서 공연된 '대머리 여가수'는 인기 폭발이었다. 3개월 장기 공연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카페 떼아뜨르는 소극장 운동의 새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돼 일시적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공연법과 보건법에 걸린 게 이유였다. 당시의 법으로는 카페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할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병복 선생은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까지 끌려갔다. 이쯤 되면 한국 사회가 문화와 예술에 대해 어떤 대접을 했는지 알 만하지 않을까. 나를 포함한 연극인들이 탄원서를 쓰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억울함을 하소연한 끝에 이 선생은 풀려났다. 그리고 카페 떼아뜨르는 다시 연극인들 품으로 돌아와 75년 11월 폐관할 때까지 우리 곁에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바로 지금은 남편이 된 이지송 소위의 부탁을 받고 함께 군 부대 위문 공연을 갔던 친구 함현진, 추송웅과 콤비를 이뤄 '햇빛 밝은 아침'이나 '우정' 등을 공연했다. 돌이켜 보건대 카페 떼아뜨르는 지금의 대학로 소극장의 원형 같은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떨었던지. 오죽했으면 추송웅이 '대머리 여가수'를 공연할 때 소품으로 들고 있던 신문이 달달달 했을까. 그걸 바로 옆에서 지켜 보면서도 모른 척 계속 공연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내 심정은 또 어땠고.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쩔쩔매기가 다반사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관객들이 바로 코 앞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봤으니 말이다.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고 땀방울까지 볼 수 있는 그 작은 공간에서 관객들은 숨죽이고 집중해서 연극을 감상했다. 덕택에 배우들은 배우대로 자신이 가진 숨은 내공의 100%를 그대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걸 드러내 놓은 채로 관객과 만나는 건 참으로 아슬아슬하고 가슴 떨리고 두렵기까지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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