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으로 회사에 다니고 있는 H씨는 올 여름에 첫 아이를 출산했다. 그런데 마침 계약기간이 끝나는 시점이어서 재계약을 거부당하고 근로자라면 다 받을 수 있는 유급출산휴가도 받지 못했다.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L씨 역시 계약직임에도 다행히 계약기간을 한참 남겨놓고 출산해 유급출산휴가를 받았다.그러나 결국 기간만료 후 출산휴가가 빌미가 되어 재계약을 거부당했다. 내내 회사에서 비슷한 업무를 취급하던 P씨가 정규직으로서 두 아이를 낳을 때마다 출산휴가를 모두 쓰고 원직에 복직하는 것을 지켜본 이들은 계약직이라는 자신들의 억울한 지위만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K씨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정규직과 똑같이 근로자의 권익과 복지를 위해 고용보험과 산재보상업무를 하지만 정작 자신은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정규직이 받는 급여의 60%밖에 받지 못한다. K씨와 처지가 같은 사람이 열명에 세명 꼴이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이 노동법을 실천하는 기관이니 부당함을 요구하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여러 번 상사에게 건의와 항의를 했고, 동료직원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요구하며 자살까지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계약직에 대한 이런 일상화된 차별은 정말 타당한 것일까?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우리 노동법도 합리적인 이유없이 사람을 차별할 수 없다고 정해 놓았고, 조금이라도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법원이나 무슨무슨 위원회로 제 일을 가져가기에 열심인 우리 국민들인데, 모두가 계약직 또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하는 데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파견직이나 계약직 등 비정규직은 그 업무가 계속될 것으로 기대할 수 없고 한시적일 때에 필요한 고용형태이고, 이러한 경우만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많은 사용자들이 아무런 제한 없이 계약직으로 근로자를 채용하여 임금은 훨씬 적게 지급하면서 상시적인 업무를 시키고 있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상의 해고제한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은 채 계약갱신 거부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해고를 한다.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반 이상의 남성노동자와 70% 이상의 여성노동자가 비정규직이며, 이들 중 상당수는 반복적으로 계약을 갱신하고 있다. 필자가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공익위원으로 참여하여 구제신청사건을 심판하면서 접하는 해고사건의 대부분은 계약직 근로자들의 것이다. 그들은 늘 자신들은 계약직이지만 계약이 반복적으로 갱신되어 왔으므로 계약기간은 별 의미가 없는 형식적인 것이어서 정규직과 다름없는데, 사용자가 정당한 이유없이 계약갱신을 거부하였으므로 부당한 해고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는 대법원 판결이 밝힌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논리에 따라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계약갱신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유는 사용자가 계약갱신 여부를 선택할 수 있으며, 근로자 자신도 스스로가 계약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계약기간을 정하는 것은 단지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쯤에 이르면 계약직 혹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은 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 버린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도 차별을 정당화 시키는 신분제도가 되는 것이다.
정부도, 사용자도, 법원도, 노동위원회도, 정규직 근로자들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여기는 듯하다. 단지 계약직,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여 국민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헌법을 가진 나라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 나라에서, 이렇게 또 하나의 신분제는 자리잡고 있다. 이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 일 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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