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원숭이의 동작을 연구하기 위해 그 동안 창경원, 어린이 대공원의 원숭이 우리 앞에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1977년 8월22일자 한국일보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연극 배우 추송웅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의 연기 인생 15년을 기념하는 '빨간 피터의 고백' 공연이 20일부터 명동 창고극장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추송웅의 모노 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은 그가 죽기 전까지 1,000회 공연의 대기록을 세워 연극사의 기념비가 됐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 기획했고 연출과 배우를 도맡아 쓰러져 가면서까지 공연했던 '빨간 피터의 고백'은 추송웅 그 자체였다.
그가 85년 세상을 떠난 이후 권혁풍을 비롯한 수많은 연기자들이 피터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피터를 보며 결국엔 추송웅을 떠올렸다. 연기자들에게 '빨간 피터의 고백'은 쉽게 넘지 못할 벽이었던 셈이다.
그 벽에 연극계의 팔방미인 장두이가 도전했다. 극단 향(대표 박미향)의 창단 작품으로 4일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에서 개막했고, 내년 1월25일까지 공연하는 '춤추는 원숭이 빨간 피터'(장두이 연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장두이 버전의 피터는 추송웅 버전의 피터와 분명히 다르다. '빨간 피터의 고백'은 널리 알려져 있듯 프란츠 카프카 원작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각색한 작품이다. 밀림에서 잡혀와 서커스 스타가 된 원숭이 빨간 피터가 학술원 회원 앞에서 스스로의 인간화 과정을 보고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추송웅 버전은 자연스레 "존경하는 학술원 회원 여러분"으로 시작된다.
반면 장두이의 '춤추는 원숭이 빨간 피터'는 "안녕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로 출발한다. 장두이씨가 카프카의 원작을 손질해 학술원 회원에게 드리는 보고가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원숭이가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꾸몄다.
차이는 이것만이 아니다. 추송웅씨가 원숭이 우리와 그네를 합친 장치 하나만으로 공연하던 것과 달리 장두이는 정글과 놀이터를 합쳐 놓은 듯한 스타일의 무대를 꾸몄다. 음악도 추송웅씨의 경우 사용하지 않았지만 장두이는 과감히 사용한다.
주제의식도 다르다. 추씨의 경우 빨간 피터가 연극 무대에 서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대변했다. 동물이 바라보는 인간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담았다. 장씨는 여기에 의미를 하나 더 보탰다. "1년에 평균 5억 마리 이상의 동물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동물 보호의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추송웅 버전과 장두이 버전의 결정적 차이는 추씨의 것이 시종 암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데 반해 장씨의 것은 코믹하고 발랄한 요소를 부각한 점이다.
그는 "이번 공연이 잘돼서 보다 다양한 버전의 '빨간 피터의 고백'이 관객 곁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고 털어놓았다. 개성 있는 연기자로, 뛰어난 연출가로 인정 받고 있는 그가 과연 우리 시대의 '빨간 피터'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02) 3673―1545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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