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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거의 모든 것의 역사

입력
2003.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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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지음·이덕환 옮김 까치 발행·2만3,000원

지난해 가을 프랑스의 쌍둥이 물리학자 이고리 보그다노프와 그릭카 보그다노프가 전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대폭발 이전의 우주에 해당하는 아무것도 없는(nothingness) 우주를 설명하겠다는 야심찬 이론을 발표했다. 세계 물리학계는 이를 두고 천재의 업적이냐, 아니면 속임수냐의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 때 컬럼비아대 물리학자 피터 보이트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과학적 면에서는 거의 완벽한 엉터리이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다른 논문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학은 어느 시대라도 대중이 손쉽게,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과 과학 이론의 괴리는 갈수록 커지고, 지금은 과학자들끼리도 역사적 발견과 그럴듯한 사기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게 됐으니 참 딱한 일이다. 이런 상황을 자성하듯 대중적 과학 저술이 만개하고 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은 연구 업적도 업적이지만 뛰어난 글 솜씨를 발휘한 대중 과학서로써 친숙하다. 국내 과학자 중에도 교양 과학서 저술·번역으로 이름난 사람이 여럿이다. 최재천, 고중숙, 김희준, 박부성, 이정모 같은 생물학자, 화학자, 수학자의 이름이 떠오른다.

쉽고, 재미있게, 마치 소설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대중과학서의 편집 지침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는 이 원칙을 가장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 책이라고해도 지나침이 없다. 빌 브라이슨(사진)은 영국에서 여행 전문기자를 오래 했고 썩 재미있고 이름난 여행 책을 여러 권 썼다. 과학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는 건 대중과학서를 쓰는 데 최대 약점이자 최대 강점이다. 전문가들이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어쩌면 그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내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수식과 얼른 이해하기 힘든 용어로 가득 찬 초등학교 과학 교과서와는 다른 과학책을 쓰고 싶었고, 우주와 지구와 원자와 생명에 대해, 또 과학자들이 그런 비밀을 알아내는 과정에 대해 알고 싶어 저자는 3년 동안 과학책과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잡지, 뉴욕타임스의 과학기사를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50여 명의 과학자들을 직접 만나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그 작업의 결과로 올해 5월 미국에서 이 책을 냈다.

이 책에는 이미 정평이 난 저자의 유머와 재치가 살아 있다. 그래서 소설처럼 술술 읽힌다. 원자, 상대성 이론, 유전자, 생명의 진화 과정과 그 과학적 발견은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실화만큼 재미있는 소설은 없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도 해당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양성자는 알파벳 i의 점에 해당하는 공간에 5,000억 개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그런 양성자를 10억 분의 1 정도의 부피로 축소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작고 작은 공간에 어떻게 해서든지 대략 30㎚ 정도의 물질을 채워넣는다고 상상해 보자. 이제 우주를 만들 준비가 된 셈이다.' '지구 45억 년 역사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한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하려면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한 손의 손톱 끝에서부터 다른 손의 손목까지가 선캄브리아기에 해당한다. 고등생물은 모두 그 다른 손의 손바닥 안에서 생겨났고 인간의 모든 역사는 손톱줄로 손톱을 다듬을 때 떨어져 나오는 중간 크기의 손톱 조각 한 알 속에 들어가 버린다.'

책은 크게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의 생성과 구성, 원자의 발견과 운동, 생명의 탄생과 진화, 유인원과 현생 인류의 등장까지 책 이름 그대로 일반인들이 과학과 관련해 궁금해 할만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첫 장에서는 대폭발(빅뱅) 이론과 팽창 이론이 등장하고, 이어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열역학, 양자론, 상대성이론, 소립자와 초끈 이론이 나온다.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대목은 생명의 역사이다. '약간의 화학물질이 생명이 되기 위해 안달하다가' 일어난 아주 특별한 사건인 대탄생(Big Birth) 이후 인간이 생겨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브라이슨은 순간순간 날카로운 눈빛을 빛낸다. '우리 모두는 거의 40억 년 전에 시작되었던 단 한 번의 유전적 마술이 세대를 통해서 끊임없이 이어진 결과이다. 그래서 인간의 유전 정보의 일부를 잘라서 잘못된 효모 세포에 넣어주면, 그 효모 세포는 그 유전 정보가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착각을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은 생명, 그 자체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생명은 그저 존재하고 싶어할 뿐이다.' '만약 우리의 외로운 우주에서 생명이 어디를 지나왔는가를 기록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감시할 일을 맡길 수 있는 생물을 디자인하려고 한다면, 그런 일을 절대 인간에게 맡기면 안 된다.'

스위스 베른 특허국 하급 기술사로 있으면서 1905년 발표한 3편의 논문으로 노벨상을 받고, 원자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급기야 세상 자체를 바꾼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설명하는 대목이나 진화론을 둘러싼 콘웨이 모리스와 굴드의 논쟁을 소개하는 대목은 이 책을 과학사나 과학논쟁사로 읽을 수 있게 한다.

저자처럼 초등학교 이후로 '과학은 당연히 재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돈벌이가 안 된다고 자연계와 이공계를 기피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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