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12월5일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가 평양에서 태어났다. 1965년 스페인 마요르카섬에서 몰(沒). 오늘날의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6년에 베를린에서 작곡한 '한국환상곡' 마지막 악장이다. 이 곡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로 채택되었다. 일제 시대의 조선인들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오랜 옛날부터'라는 뜻)의 구슬픈 선율에 애국가 가사를 실어 부르곤 했다.4절로 이뤄진 지금의 애국가 가사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지금 형태로 다듬어졌기 쉬울 것이다. 현역 군인이 아니라면, 애국가 가사가 한두 군데 가물가물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궁화 삼천리'로 시작하는 후렴은 빼고 3절과 4절을 한 번 불러 보자. 3절은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고, 4절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다. 요즘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공활(空豁)하다'는 말은 '텅 비어 너르다'는 뜻이다. 북한의 국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애국가'로 불린다. 해방 직후 시인 박세영이 쓴 가사에 김원균이 곡을 붙였다고 한다.
안익태는 도쿄(東京)와 필라델피아에서 첼로를 배운 뒤 유럽으로 건너가 작곡과 지휘를 배웠다. 스승 가운데는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있었다. 그가 유럽에 정착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다. 안익태가 당대의 파시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그는 나치 협력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배려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에서 활동했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파시스트 정권이 건재하던 스페인으로 건너가 가정을 이루고 정착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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