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과 윤선도는 강호의 아름다움을 섬세한 우리말로 직조해 낸 조선 조 최고의 작가들이다. 이들의 작품에는 각자의 뚜렷한 개성적 미학이 내재해 있지만, 그 노래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차이점 못지않은 유사점도 존재한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나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청소년기에 전라도로 이주해 호남 시단의 감각적이고 풍류 넘치는 시적 전통을 체득했다.그러나 이들 시학의 가장 큰 공통점은 다소 의외의 지점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섬세한 서정과 주옥 같은 언어가 실은 16세기 말∼17세기 중엽의 격렬한 당쟁의 피내음 속에서 완성됐다는 아이러니컬한 창작 정황이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은 시적 감수성이 탁월한 천재적 시인인 한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국량(局量)을 지닌 경세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당 위의 사나운 범, 정철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통해 정철이 그렇게도 애틋하게 그리워했던 선조 임금은 그의 강직성과 충성, 절개를 높이 평가해 '이른바 봉황의 대열에 드는 한 마리 수리요, 전당 위의 사나운 범'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맹금·맹수의 이미지는 통상 비타협과 독선의 행동 방식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정철의 대쪽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있다. 27세에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한 정철은 사헌부지평에 임명돼 명종의 사촌형인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탈취하려고 처남을 살해한 사건을 맡았다. 친인척 관련 사건이어서 관대히 처분하라는 명종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지만 그는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 경양군을 기어이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철의 처신은 강직하다는 평과 동시에 편벽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정철의 40·50대 시절은 동서분당을 거쳐 극심한 권력투쟁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그 또한 서인(西人)의 영수가 되어 이전투구의 한복판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동서대립의 극렬한 쟁투를 제유(提喩)적으로 보여주는 시 한 편을 보자.
'푸른 버들 북문에 말굽소리 요란한데(綠楊官北馬蹄驕)/ 객의 방엔 사람 없어 고요와 짝을 하네(客枕無人伴寂廖)/ 두어 개의 긴 수염을 그대 뽑아 가니(數箇長髥君拉去)/ 노부의 풍채 문득 쓸쓸하여라(老夫風采便蕭條)'―'운을 따서 지어 이발에게 주다(次贈李潑)'
당시 다수당이던 소장파의 동인(東人) 이발(李潑)이 취중에 농을 하며 서인의 수장인 정철의 긴 수염을 뽑아 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희화화한 시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사람 없는 방으로 대비되는 수적 열세의 불리한 상황이 암시되고, 어처구니 없는 사건 뒤의 쓸쓸한 심사가 배어나는 작품이다. 훗날 정철이 위관을 맡아 사건을 처리한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서는 1,000여 명의 동인 인사가 숙청됐는데 여기에 이발이 포함됐음은 물론이다.
4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 정철은 당쟁으로 수 차례 진퇴를 거듭하였는데 바로 이때 내려가 있던 경기도 고양과 전라도 창평에서 국문시가의 명편들이 쏟아졌다. 네 편의 가사를 포함해 강호적 삶을 지향한 대다수의 시조 작품들이 이때 창작된 것이다.
죽을지언정 말하리라, 윤선도
당파적 입장에서 윤선도 가문은 정철의 집안과 대립했다. 윤선도 집안은 호남에서 몇 안 되는 동인 가문이었으며, 정철이 처리한 정여립 모반사건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정개청 옥사 사건에 연루돼 윤선도의 조부 윤의중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동인은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뉜다. 정철보다 두 세대 뒤에 태어난 윤선도는 붕당기의 정치 권력 역학 관계에서 열세에 있었던 남인이었다.
거침없는 직언과 강직한 처세라면 윤선도 또한 정철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관직에 발을 들이기도 전인 30세에 그는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대북파 수장 이이첨의 국정 농단과 이를 묵인한 유희분, 박승종의 죄상을 신랄하게 비판해 7년 유배 생활을 겪었다. 이런 중에 '견회요'(遣懷謠·32세에 유배지인 함경도 경원에서 지은 시조)와 같은 빼어난 작품을 창작했다. 42세에 문과 별시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師傅)가 되고, 47세에 증광 문과에 급제해 예조정랑에 오르는 등 앞길이 트이기도 했지만, 인조의 신임을 시기한 재상 강석기의 모함을 받아 결국 낙향하고 말았다.
'환희원 안에도 환희는 없으니(歡喜院中歡喜無)/ 강남 가는 나그네 긴 탄식 일어나네(江南歸客興長?)/ 경륜을 펴지도 못한 채 여기서 병드니(經綸未展病於此)/ 수많은 창생들 어느 날에나 소생시키리(萬億蒼生何日蘇)'―'환희원 벽 위의 시에서 운을 따서 짓다(次歡喜院壁上韻)'
귀향 도중에 지은 이 시에는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이상을 펼치지 못한 채 낙향해야 하는 쓸쓸한 심회가 담겨 있다. 치열한 정쟁의 붕당기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그가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란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의 문예 창작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은 50세에 발발한 병자호란이다. 향족과 가솔을 이끌고 강화도로 달려갔지만, 강화도는 이미 함락됐고 인조는 난리를 피해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만 전해 들은 그는 제주도 은거를 결심한다. 제주도로 가던 중 발견한 보길도의 부용동, 다시 영덕 유배에서 풀려난 뒤 발견한 해남의 금쇄동과 수정동 등은 심미성의 절정에 이른 강호미학의 산실이 되었다.
이후로도 윤선도는 현실정치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며 진퇴를 거듭했다. 74세의 노년에도 복제(服制)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가 삼수에 위리안치(圍籬安置·중죄인을 격리해서 가둠)되기도 했다. 생애 가운데 도합 20여 년에 이르는 신산한 유배 생활과 그에 상응하는 기간의 은거생활이 강호의 체험적 서정을 엮어낼 수 있는 터전이었음은 두 말 할 여지가 없다.
호방한 상상력과 심미적 세계 인식
시조보다 가사에서 더욱 빼어난 성취를 보인 정철의 시세계는 웅혼하고 호방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정철은 무엇보다 역동적인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능해 작품 전체에 생동감이 넘친다. '관동별곡'의 망양정 장면을 보자. '천근(天根)을 못내보와 망양정(望洋亭)에 올른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 노한 고래 뉘라서 놀래관대/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은산(銀山)을 꺾어내어 육합(六合)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長天)에 백설(白雪)은 무슨일고?'
바다 밖의 우주에 관한 사유, 파도 치는 장면의 장엄한 묘사를 통해 놀랍도록 웅장한 화폭을 펼쳐내고 있다. 정철의 낭만적 상상력은 자주 현실계를 초월해 신선이 노니는 신비로운 도선(道仙)의 세계를 배회하기도 하고, 취흥에 젖은 질탕한 풍류로 달리기도 한다.
이에 비해 윤선도의 시세계는 지극히 정적이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정치적 행적과 유배생활을 관류했던 꺾일 수 없는 기개가 그토록 매혹적인 시정(詩情)과 도대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었는지가 사람들의 오랜 관심사이다. '고운 볕이 쬐엿는데 물결이 기름같다/ 이어라 이어라/ 그믈을 주어두랴 낚시를 놓아둘까/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탁영가의 흥(興)이 나니 고기도 잊을로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봄 노래 가운데 하나에서 자연세계가 빚어낸 우연하고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놀랍도록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해내고 있다. 따스한 봄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사하는 바다 물결, 그 황홀한 세계에 취해서 고기잡이마저 잊어버린 서정적 자아의 드높은 흥취를 시화(詩化)한 솜씨는 그야말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할 것이다.
이형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정철 鄭澈
1536년(중종 31년)에 서울 장의동에서 태어나 1593년(선조 26년) 강화도 송정촌에서 세상을 떠났다. 집안이 왕실과 혼인해 행복한 유년을 보내다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집안이 풍비박산한 후 담양의 창평으로 옮겼다. 송순, 김인후 등 호남의 학자·문인을 스승으로 삼아 문예를 익혔으며, 훗날 선조의 신임을 받아 서인의 영수로 성장했다. 기축옥사에서 동인들을 가혹하게 처리한 일 때문에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송강집' '송강가사' 등 문집과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윤선도 尹善道
1587년(선조 20년)에 서울 연화방에서 출생해 1671년(현종 12년)에 보길도 부용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8세 때 백부에게 입양돼 해남에서 생활했다. 경사(經史)뿐만 아니라 의약, 복술, 음양, 예학 등 다방면에 밝았고 봉림·인평대군의 스승을 맡기도 했다. 왕권강화론을 펼친 남인의 일원이었으며 강직한 상소로 숱한 유배생활을 겪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년)에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돼 이조판서가 추증됐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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