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M씨는 최근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한 강남의 척추·관절 전문 나누리병원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미술을 좋아해 평소 미술관이나 인사동, 사간동의 화랑가를 즐겨 찾는 그가 잘 아는 작가의 작품이 병원 곳곳에 걸려 있었다. 입구 로비에서부터 각 층 진료실, 입원실, 식당에까지 서양화가 정현숙씨의 작품 20여 점이 '존재의 어둠을 담금질하는 빛'이라는 제목으로 전시 중이었다. 웬만한 화랑 전시회 못지않은 규모와 내용이었다.나누리병원(원장 장일태)은 9월17일 개원하면서부터 '그림이 있는 병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주)서울옥션 아트컨설팅 팀과 협의해 계절, 테마별로 연중 기획전을 계속하기로 한 것. 정씨의 작품전은 그 첫번째 기획이다.
임재현(40) 부원장은 "서비스를 최우선으로 하는 새로운 병원문화를 생각하며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림이 있는 병원' 프로그램을 결정했다"며 "무엇보다 환자들이 그림을 보며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고, 나아가 미술 자체에 흥미도 갖게 되는 것 같아 만족한다"고 말했다. "과거 미국의 병원을 가보고 실제 화랑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 병원도 수술법이나 의학정보를 담은 게시물로 위압감을 주거나, 값싼 이발소 그림 혹은 복사판 포스터를 병실에 내걸 게 아니라 좋은 예술품이 살아 숨쉬는 편안하고 격조 있는 공간으로 꾸미려 한다"는 것이다.
서울옥션 아트컨설팅 팀은 '병원의 갤러리화'를 위해 병원 내부의 철저한 공간 분석을 했다. 우선 병원의 성격과 주 고객층의 연령대까지 고려해 모던한 이미지의 작가들을 선정했다. MRI실에는 의료기 앞에 선 환자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작품, 병원 식당에는 의료진과 환자가 만나 심미적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모티프와 색감을 가진 작품을 골랐다. 이 같은 기획에 따라 미니멀한 추상화이면서도 따뜻한 동양적 감성이 배어나는 정현숙씨의 작품이 가을 분위기에 맞게 27일까지 3개월간 전시되는 데 이어 장순업, 박영남, 손진아씨 등의 작품 전시도 추진 중이다.
사실상 병원에서 열리는 개인전이나 다를 바 없는 이 프로그램은 작가들이 작품을 임대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서울옥션 컨설팅 팀원들은 발로 뛰어 병원은 물론 관공서, 오피스 건물 등 전시 대상공간, 즉 잠재적 고객을 고른 다음 철저한 공간 분석을 거쳐 '맞춤형 전시기획'을 제시한다.
처음에는 뜨악해 하던 고객들은 컨설팅 팀의 프리젠테이션에 따라 평범한 건물 내부가 미술관처럼 변신하는 데, 반신반의하던 작가들은 작품 임대가 판매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점점 크게 호응하고 있다. 정현숙씨는 "무엇보다 미술관, 화랑이라는 정해진 전시공간이 아니라 병원이라는 생활공간에서 평범한 이웃들에게 작품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가뜩이나 위축된 미술계 현실에서 서울옥션 컨설팅 팀의 이 같은 시도는 새로운 미술시장의 창출인 셈이다. 서울옥션은 지난해부터 아파트 등 일반 가정에 그림을 일정 기간 맞춤 임대하는 '그림이 있는 집' 프로그램으로도 적지 않은 호응을 얻었다. 한여훈 컨설팅 팀장은 "처음에는 외판원 취급 받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하지만 나누리 병원의 경우처럼 공간 컨셉에 맞게 작가와 작품을 구성, 몇 달 동안이라도 끈질기게 접촉과 설득을 계속해서 전시가 이뤄지면 '생활공간의 갤러리화'에 모두 공감한다"며 웃었다. 소문이 나자 서울 시내 병원들은 물론 부천 등 지방에서도 컨설팅 문의가 오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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