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에서 20번 국도를 따라 경북 청도로 가는 길에 버티재를 넘어 평지로 들어서면 작은 마을과 함께 오래된 느티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좌우에 늘어서 있다. 이 마을이 바로 금곡리이고, 그 앞에 있는 숲은 청도사람들이 금곡숲으로 부르는 금곡리 마을숲이다.이 마을에는 원래 밀양 변씨가 1500년대 초에 들어왔다고 하나, 평택 임씨 입향조(평택임씨 마을을 처음 세운 조상)인 임계량 공이 1600년대 초에 이 마을에 정착해 후손의 융성을 기원하면서 마을의 기틀을 다졌다고 한다. 마을 주산이 오행 중에 금(金)에 해당해 쇠골이라고 불러오다가 임개량 공이 금동(金洞)으로 개칭하였고, 그 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금곡리로 정하였다.
금곡리는 멀리 비슬산으로부터 뻗어 온 산줄기로 둘러싸여 안온하다. 그러나 마을 앞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부터 흘러든 물이 모여 큰 내를 이루고 이로 인해 허전하게 뚫려 있다.
풍수지리와 같은 전통 지식체계에서는 "마을입구에서동네가 보이면 좋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지형상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즉 비보(裨補)를 위해 숲을 많이 조성했다. 실제로 이 마을에도 재앙이 빈번히 발생했으나 나무를 많이 심고 이들 나무가 자란 다음부터는 젊은이들이 죽는 흉사와 재해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화평하고 부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마을 북쪽에 있는 옥녀봉이 선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이라 마을 앞의 골을 거문고 줄을 고르는 형태로 보고 장안곡, 고려실곡이라 부르면서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했다. 마을숲은 바로 거문고 줄을 매어두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부터 괴이한 수형이 깊은 영감을 주는 느티나무를 괴목(槐木)이라 숭상하였으니 오래된 괴목 숲에서 울려 나오는 유장한 거문고 소리는 청도(淸道)를 알리기에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현재 높이가 10m를 넘고, 줄기의 지름이 20㎝에서 1m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양의 나무들이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숲도 중앙행정과 연계되어 잘 보존된 것이다. 청도군지에서는 이 숲을 조선시대 역원제도(驛院制度)에 따라 이정(里程) 표시로 10리마다 작은 도랑을, 30리마다 큰 도랑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을 때 조성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중앙 행정의 요구와 지방의 필요성이 합쳐졌을 때 일은 쉽게 성사되고, 오래 보존된다.
옛날에는 이 숲이 창녕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래서 주막이 생겼고 그래서 주막이라고도 불렀고, 또한 마을 한 모퉁이에 있기 때문에 자연히 모퉁이라고도 불렀다. 행인들은 이 숲에 있던 주막에서 창녕방면의 까마득히 높은 마령치를 넘기 전에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술잔을 기울이면서 떠나가는 이별을 아쉬워하였을 것이고, 창녕에서 넘어온 행인들도 역시 한 잔씩 목을 적시고 시장한 배를 채우면서 옛 사람을 만나 손을 잡고 반겼을 것이다. 마을숲은 이에 머물지 않는다. 지역주민들은 이 숲의 잎이 일제히 피어나면 그 해 농사는 풍년이 들고 불규칙적으로 피면 흉년이 온다고 믿을 정도로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청도군청과 함께 숲 둘레에 철책을 설치하여 보호하면서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뿐 아니라 마을과 농경지에 대한 방풍림 및 호안림 역할을 맡기고 있다. 이번 태풍 매미가 지나간 이후에 필자가 들렀을 때에는 위에서 몰려온 큰물이 농경지를 넘보고 달려들었으나 이 숲의 나무들이 일부는 넘어지고 떠내려가면서도 서로 버틴 덕에 농경지와 마을을 보호하였음은 물론 마을숲도 일부만 유실되고 대부분 남아있다.
우리 사회가 어려웠을 때 어느 분은 아름다운 경구를 선사하였다. "나무가 나무에게말했습니다. 우리가 숲이 되어 지키자고."
신 준 환 임업연구원 박사 kecology@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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