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랍권 국가들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막대한 석유 매장량과 광활한 사막, 이슬람교 정도? 좀 더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여러 국가가 전근대적 왕정을 유지하고 있고, 이슬람 원리주의인 와하비즘(Wahhabism)이 반서방 테러집단의 이념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모른다. 하지만 단편적 정보를 넘어 아랍 세계의 문화와 종교에 대해 우리 국민 대다수는 거의 무지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랍 국가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한지도 벌써 30여년이 지났다. 우리 건설회사가 중동에서 처음 계약을 따낸 것은 1972년 8월. 오일위기를 오일달러로 극복하려던 정부의 적극적 노력 덕분에 1974년 이래 중동진출이 붐을 이룬다. 연인원 100만명이 넘는 근로자들이 열사의 사막에서 외화를 벌어왔고 중동 건설 특수는 월남전 특수가 끝나면서 위기를 겪던 우리 경제에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기름값이 내려가면서 다시 아랍 세계는 우리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1980년대초 이후 아랍 국가들이 우리 국민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기껏해야 축구시합을 할 때뿐이었다.
제국주의가 융성하던 19세기에 제국 군대의 척후대 역할은 흔히 선교사와 인류학자의 차지였다. 장사꾼과 군인의 냉혹한 논리를 추종하던 제국주의도 먼저 문화를 퍼뜨리고 문화를 이해하는 부드러운 방법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식민지 경영의 음험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 접근법의 유효성에 대해서는 부인하기 어렵다. 제국주의가 결국 강제의 지배로 귀결되었다고 애초의 접근법마저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우리가 아랍 세계에 먼저 보냈던 것은 상인들이었다. 아랍 세계의 도움으로 경제위기를 이겨냈지만 그 교류가 진정한 문화적 접촉으로 연결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군인을 보내려 하고 있다. 국제정치의 냉엄한 논리가 이제까지의 무심함을 합리화한다. 이라크전 종전 이후 제 2의 중동 특수에 대한 기대가 성급한 파병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낯선 문화와 만나는 올바른 방법일까. 노련한 장사꾼은 물건을 팔기 전에 먼저 신뢰를 파는 법. 불량품을 속여 판 후 종적을 감추는 뜨내기 장사꾼처럼 되지 않으려면 지금은 군대를 보내기 전에 문화 교류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이라크전 발발 후 최초로 한국인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정부의 이라크 파병 방침은 여전히 확고하다. 일각에서는 전투병을 파병해야 오히려 희생자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는 똑같은 점령군인데도 왜 미국군에 비해 영국군의 희생이 월등히 적은지를 냉정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희생자의 수는 군대의 전력이 아니라 상대방 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 말이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개와 고양이의 의사소통 방식이 서로 달라 불일치를 빚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이른바 코드가 맞지 않으면 한 쪽이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있어도 오해를 빚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랍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코드가 서로 일치하는가. 아니 코드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조차 한 번이라도 해 본 적 있는가. 코드를 강조하는 현 정권이 코드에 대한 고려 없이 덜컥 파병만을 강행하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군대를 보내기에 앞서 먼저 신뢰를 보낼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도주의적인 파병임을 강조하더라도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라크인들은 단지 미국의 침략을 원조하는 것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문화적 접촉과 그를 통한 신뢰의 축적이 없는 한 아무리 많은 의료진과 건설공병을 보낸들 그저 테러의 목표물만 늘리는 것이 되지 않을까?
정 준 영 동덕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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