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정(21)은 박찬욱 감독이 충무로에 선물한 보석 같은 배우다. 격정의 복수극'올드보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최민식(오대수)의 호연이지만, 그의 상대 역 강혜정(미도)이 내뿜는 열기도 예사롭지 않다.오대수가 이우진(유지태)에게 납치되던 날 내리던 비처럼, 강혜정의 연기는 관객의 마음을 적신다. 미도가 차 안에서 울면서 민해경의 '보고 싶은 얼굴'을 부르는 장면, "나 너무 아프지만 참는 거야. 그거 알아야 돼"라고 여관에서 오대수에게 말하는 정사 장면은 생니가 뽑혀 나가고 손목과 혀가 잘리는 난폭한 장르 영화에 인간적인 숨결을 불어넣었다
300 대 1
5년 전 TV 드라마 '은실이'에서 은실이를 괴롭히던 영채와 '올드보이'의 미도는 도저히 같은 사람 같지 않다. 박찬욱 감독은 "특이하게 생기지 않았나? 긴장하지 않고 똑부러지게 잘하고, 영화 '나비'에서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300 대 1의 경쟁을 뚫고 미도 역을 따낸 데는 그런 개성적인 면모가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감독님이 '서운하게 생겼어'라고 했는데 예쁘단 말보다 정감 있어 좋아요. 봉준호 감독과 찍은 한영애 뮤직비디오에는 눈만 큰 외계인처럼 나왔지만."
오디션에서 뽑혔을 때는 "꿈만 같고, 울뻔 했다." "박 감독, 최민식 선배님이 하는 영화인데 더 할 얘기가 있나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해머로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읽으려고 읽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가 내게 읊어주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정사 신은 빼지 말아 주세요
오대수가 감금방에서 나와 만난 여인 미도는 어릴 적부터 부모 없이 홀로 자란, '몸서리치는 외로움에 이력이 난' 여자다. 미도의 외로운 눈빛과, 15년의 감금으로 깊게 팬 최민식의 주름살은 짙은 호소력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두 사람이 나누는 격렬한 정사조차 쓸쓸하기 그지없다. 올해 충무로 영화 가운데 가장 슬픈 정사 장면 중 하나다. 강혜정의 첫 베드신이었다. "그 장면이 없었으면 절정이 살지 않았을 거예요. 당연한 것이어서 시작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정사 신을 뺀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빼지 말아 달라고 했죠. 육체적으로 부대끼는 건 힘든 게 아니에요. 이유가 있으면 감수해야죠."
사귀고 싶은 남자 박찬욱, 결혼하고 싶은 남자 최민식
촬영 중에 인기 남성 스태프와 배우를 뽑는 투표가 있었다. 강씨는 '사귀고 싶은 남자'에 박 감독,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최민식을 적었다.
"민폐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에 긴장한 나머지 파주에서 첫 촬영 때 점심도 걸렀는데, 최선배도 점심을 같이 거르면서 '네가 바로 미도니까 느끼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해서 큰 힘이 되었어요. 박 감독님은 '익혀야 할 것'을 쪽지를 적어주시며 이끄셨고요. 그들은 선장(감독)과 항해사(최민식), 나는 그들을 좋아하는 선원이었죠."
'행복한 항해'를 되짚는 그의 표정은 환했다. "실은 후환이 두려워 그렇게 투표했다(웃음)"고 자백을 하긴 했지만.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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