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9월 충청도 황간현 남면(현 충북 영동군 황간면) 신평리에서 음작용이라는 사내가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의 죽음이 부인과 그녀의 정부(情夫)에 의한 독살인가 아니면 단순한 병사(病死)인가 하는 점이었다. 9월12일 죽은 음작용의 숙부 음복원은 조카가 타살됐다고 관아에 고발했다. 음작용의 부인 이씨와 정부 이치장의 공모 살해가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헌(東軒)에서 이치장은 전연 다르게 진술했다. 이치장은 음작용의 건강이 나쁘다는 말을 듣고 보신이나 하라며 닭국을 준 것뿐인데, 음작용이 죽자 자신과 음작용의 아내 이씨 부인의 화간 사실을 안 음복원이 동학교인들과 짜고 닭국에 독을 넣어 조카를 죽인 게 분명하다며 자신을 구타하고 주리를 틀었다고 말했다. 이씨 부인 역시 협박에 못 이겨 거짓으로 그리했노라고 증언했으나 사실은 음복원과 동학교인들이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벌인 공모극이라고 주장했다.재산을 탐낸 음모?
"동학교도들과 음복원이 저를 잡아다가 주리를 틀고 결박하고 위협하며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따지기에 '내 본시 잘못이 없고 죄명도 알지 못하겠소'라고 답하니 교인(敎人)들이 다시 '네가 남편이 있는 여자와 간통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다 할 것이며, 또 약을 타서 음작용에게 먹게 해 병을 얻게 했으니 이것은 또 누구의 잘못이더냐. 이래도 죽을 죄가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는 본래 극약을 타서 먹게 한 일이 없는지라 극구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음작용의 처 이씨 역시 잡혀와 저처럼 결박 당했는데 그들이 주리를 틀며 독약을 먹였는지 묻자 그녀는 참으로 맹랑한 말이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이씨 부인의 주리를 틀었고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제가 닭국을 주어 남편에게 먹였다고 답한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교인들은 제게 '인명이 중하냐, 아니면 재산이 중하냐?'고 묻기에 제가 '인명이 중하오'라고 했더니 그럼 '돈 1,000냥을 당장 내 놓으라'며 계속 주리를 트는 바람에 그 자리를 면하고자 준비하겠다고 간청했던 것뿐입니다." 이치장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 모든 일은 음복원이 동학교도들과 함께 꾸며낸 일로 자신의 재산을 노린 일이라고 극구 주장했다.
하지만 음작용의 처 이씨는 이치장의 주장대로 협박에 못 이긴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일관되게 모든 일이 이치장이 사주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게다가 자신과 이치장을 모두 엄벌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이치장이 저의 부부에게 빌려준 돈을 계속 독촉하더니 하루는 제게 돈을 갚기 어려우면 나와 동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하자 그 후에는 함께 도망가자는 말 대신 약을 사다 주며 남편에게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제 남편은 본시 가슴에 통증이 있었지만 복통 증세는 없었는데 이치장이 준 닭국을 먹은 후에 복통과 설사가 심해져서 무슨 일인지 의심스러웠는데 일전에 약을 사다 주며 먹이라고 한 이치장의 말을 떠올리고는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이씨 부인은 이치장이 국을 주면서 남편에게만 먹이고 자신은 자신의 집에 와서 따로 먹도록 권유한 일도 있다고 증언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자신과 이치장을 대질 심문하면 되지 않느냐고 따졌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더니
양반 이치장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이씨 부인과 마주 앉아 대질심문을 받았다. 계속해서 이씨 부인은 자신의 남편 음작용이 사망한 이유는 자신이 독극물을 먹인 때문이라고 했다. 모두 자신에게 음심(淫心)을 품었던 이치장이 시킨 일이며 남편에게 먹이라고 준 독이 든 닭 국물 역시 이치장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치장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언제 그랬느냐. 내가 너희 부부를 살려준 죄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너를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겠도다. 도대체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내 이치장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9월26일 마침내 황간현감은 관찰사에게 이치장의 범행 일체를 보고했다. 음작용의 독살을 사주한 죄로 처벌함이 마땅하다는 발사(跋辭·사건조사를 마친 사또의 견해)였다.
지난날을 떠올리자 이치장은 더욱 억울한 생각뿐이었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온정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슬픔이 복받쳤다. 얼마 전 마을에 이사 온 음작용 내외가 살길이 없어 굶주리는 것을 보다 못해 술집이나 하고 살라며 돈을 꾸어준 일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돈을 제 때에 갚지 못한 이씨 부인의 미안해 하는 마음을 이용해 몇 번 간통한 적이 있긴 하지만 자신이 독극물을 주어 음작용을 살해하라고 한 적이 없는 것은 하늘이 아는 일인데 말이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놈의 세상이 도대체 어찌 된 것인가? 새로운 세상이 온다며 그 해 초 전라도 지방에서 불같이 일어난 동학교도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충청도에까지 들이닥쳤을 때 무언가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그였다. 스스로 도인(道人)이라고 자처하며 무리 지어 다니는 동학교인들은 마을에 들어와서는 억울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며 아무나 잡아다가 고문하고 마음대로 처벌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자신의 돈을 뜯어내려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어 이렇게 살인 누명마저 씌우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해서 기대했건만 이제 감옥에서 죽게 생겼으니 나의 운명이 애석할 따름이다." 이치장은 하염없이 세상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다
사건 발생 후 몇 달이 지난 1894년 12월 황간현감에게 재조사를 지시하는 한 통의 비밀 훈령이 내려왔다. '음작용 사건의 경우 각인(各人)들의 진술에 모호한 점이 있어 재조사를 해야 하나 당시 비도(匪徒·동학교인들을 정부에서 부르는 명칭)들의 소요가 크게 일어나 제대로 조사할 수 없었다. 이제 소요가 잦아들었으니 다시금 조사한 후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라.'
그런데 재조사 결과 사인(死因)이 독살(毒殺)에서 병사(病死)로 바뀌는 상황이 발생했다. 더욱이 모든 일은 음복원이 동학배들과 함께 남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공모한 결과였음이 밝혀졌다. 초검과 복검의 조사 결과가 판이하자 삼사(三査·3차 조사)가 불가피해졌다.
마침내 1895년 2월21일에 실시된 세 번째 조사에서 사건의 전말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당시 결정적 증언을 한 사람은 이치장의 친척이자 마을 존위(尊位·나이 든 어른) 이극선이었다. 그는 그 동안 말 못하고 지낸 자신을 책망하듯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고발했다.
"1894년 2월 음작용이 타관에서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살 방도가 없자 이치장이 사정을 애처롭게 여겨 쌀과 누룩 등을 빌려준 것이 40∼50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6월이 되어 이치장이 돈을 받으러 갔는데, 이때 음복원은 도리어 50냥을 내놓으면 조카며느리를 아예 내어주겠다고 제안하였고, 이에 이치장이 유부녀를 매매하려 든다며 책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8월이 되어 음복원이 동학배 100여명과 무리를 지어 이치장을 결박하고 구타한 후 가산을 빼앗았으며, (중략) 음작용의 처 역시 여러 차례 악형(惡刑)을 견디지 못해 독약을 타 먹였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제 문중 사람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전후 곤욕을 당한 것이 음복원의 음모가 아닌 것이 없는데도 동학배들이 기세등등할 때라 원수를 갚을 도리가 없어 오직 세상이 안정될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치장은 그 사이 그만 옥중에서 죽고 말았으니 원통함을 어찌 하오리까. 이제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바라나이다." 이극선의 한 맺힌 흐느낌이 이어졌다.
관찰사의 최종 처리서
이제 3차 조사의 보고를 받았더니 음작용이 병으로 천수(天壽)를 다하였으므로 죽음에 의심이 없는 법인데, 비적들이 위협하고 흉악한 계획을 세워 죽은 자를 팔아 산 자를 해치려 하였으니 의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호의로 닭국을 만들었으나 도리어 중독되었다고 공갈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릇된 판결이 오래되어 이 때문에 사람이 죽었으니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음복원이란 놈이 앞장서서 모의하고 이씨 여인도 이를 따랐으니 둘의 잘못이 차이가 없도다. 엄벌에 처하도록 할 것이다.
글 김 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그림 이철량 전북대 교수
개인의 이익위해 혁명 악용 많아
1894년의 동학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봉기였으며 억압 받는 민중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간다운 삶을 위해 대의(大義)를 부르짖는 사람도 있었지만, 음복원처럼 개인의 이익을 위해 혁명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남도(南道) 일부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고 동학교인들이 지방의 권력을 장악하자 억울한 사람들은 그 동안의 불평등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사를 들추어 보면 꼭 그렇게 희망적인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에서 동비(東匪)를 토벌하는 사이 공권력을 능가하는 동학 조직에 기대어 여러 가지 불법을 자행하는 동학교인들, 그리고 여기에 빌붙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없는 민중에게는 어차피 권력이란 나누어 갖지 못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894년 한해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그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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