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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捕]<11> 송림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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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捕]<11> 송림제화

입력
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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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 허영호와 북극횡단―1,800km를 걸어서, 95.5.7.' 매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탐험가 허영호씨의 사인이 적힌 대형사진이 시선을 잡아 끈다. 허씨가 신었던, 무릎까지 올라오는 설상화는 매장 2층에 보관돼 있다. 세계 최초로 남북극 도보탐험과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 허씨는 해외원정에서 돌아올 때마다 가장 뜻 깊은 사진으로 고마움을 전한다.송림(松林)제화의 창업주 고 이귀석(李貴石)옹의 혼이 담긴 등산화는 목숨을 건 도전에 나선 허씨에겐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장비였다. 송림의 전통은, 이렇게 이옹의 손에서 태어났다.

"송림의 명성을 앞세워 제화공장을 차렸으면 떼돈을 벌었을 텐데…." 시류에 밝은 사람들은 생전의 이옹을 보고 뒤에서 '바보'라고 소곤댔다. 그러나 그는 창업 당시의 결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평생 신을 좋은 신발을 만들자고 상호까지 송림으로 정하지 않았던가. 누가 뭐라고 하든 그는 자신의 길을 걸었다.

"남의 발을 만지면서 평생을 보내기는 솔직히 싫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아버님의 철학이랄까, 집념이랄까, 하여간 그런 삶의 자세를 이해하게 되면서 가업을 이을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차남 이덕해(李德海·52)씨는 대물림 결정 과정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마음을 굳힌 아들이 그래도 걱정스러웠던지 이옹은 96년 82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으로 가업계승을 당부했다. 함께 남긴 것은 재산이 아니라 100여 통의 편지였다. 편지마다 "편한 신발을 만들어줘 고맙다"는 고객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발의 생김새 역시 천차만별이죠. 오목하게 들어간 발바닥의 족궁은 신발제작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부위입니다. 기계화는 이런 특성을 고려하기 어려워 평균적인 모형에 따라 제작합니다. 반면 수제화는 발의 특성을 거의 완벽하게 반영할 수 있습니다." 이 사장의 고종사촌형인 임효성(林孝星·69)고문의 설명이다. 외삼촌인 이옹과 함께 송림을 이끌어온 임고문은 이제 이 사장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국산등산화의 원조답게 송림의 얼굴은 등산화다. 신사화 등은 보조상품이다. 구두제작은 우선 코르크로 고객 발바닥의 모형을 뜨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10가지의 공정을 주로 손으로 처리하다 보니 생산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67년에 이르는 긴 세월 수제화만을 고집해온 송림 제품의 우수성은 방수처리와 발바닥과 직접 접촉하는 중창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송림의 비법으로 알려진 방수가공법은 파라핀 등 4가지 약품을 혼합해 열처리를 하는 독특한 과정을 거친다. 산악인들이 겨울철에 동상의 고통을 호소하자 이옹은 직접 방수법을 개발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코르크를 중창의 소재로 활용한 제화점도 송림이다. 90년대 중반 첫 선을 보인 코르크중창은 충격흡수 기능이 탁월하다. 등산화는 주문받은 날로부터 보통 일주일이 걸려야 완성된다. 신사화는 4일 걸린다. 송림의 소중한 자산인 숙련기술자 6명이 있지만 소량 주문생산의 전통을 지키다 보니 손님이 아무리 많이 찾아와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산악인치고 송림의 등산화 한 번 안 신어 본 사람이 없지만 김영삼 전대통령에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80년대 장기간 가택연금에 묶인 김 전대통령은 질기다고 소문난 송림의 등산화 밑창이 닳을 만큼 집 마당을 돌며 분노를 삭였다고 한다. 그 닳은 밑창을 비서가 와서 교체해갔다.

이옹이 창업한 해는 1936년, 현재의 자리(중구 을지로 3가 5의 10호)에서 였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상동양화점에서 판매와 기술을 익힌 그가 3년 만에 독립을 한 것이다. 신사화로 출발한 송림이 주력제품을 등산화로 바꾼 시기는 50년대 중반. 생활에 다소 여유가 있던 사람들이 등산에 눈을 뜬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사람들은 등산화 대신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에서 영국군 군화를 구입해 신었다. 밑창이 닳게 되면 송림을 찾아와 바꿔 달았다. 역시 산을 좋아하던 이옹은 제대로 된 등산화를 만들어보자고 달려들었다. 실패를 반복하다 마침내 63년 밑창틀을 개발, 제법 모양을 갖춘 등산화를 내놓게 됐다.

그 무렵 중고생들, 특히 산악반 학생들은 송림의 등산화를 구입하기 위해 계를 조직하기도 했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이옹은 장애인용 특수화 제작에 눈을 돌린다. 장애인들이 송림의 이름을 알고 찾아와 편한 신발을 만들어 줄 것을 간절하게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장애인들은 신체적 약점을 노출하기를 꺼려 합니다.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지요. 특수한 신체적 상황을 살펴 본을 뜨기까지 대략 한 시간은 걸립니다." 장애인 특수화제작의 책임을 지고 있는 임고문의 설명이다. 송림의 2층 매장은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다.

"지금도 공장을 세워 기업화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화는 물론이고 선친의 체취가 스며 있는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대신 마케팅 방식을 개선했습니다. 고객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찾아가는 거지요. 현재는 서울과 경기 일원의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 방식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덕해 사장은 '세상에서 하나 뿐인 신발을 만들자'는 각오로 유혹을 물리친다고 말한다.

'忘足, 履之適也(망족 이지적야).' 장자의 말이다. 발을 잊게 되는 것은 신이 꼭 맞기 때문이다, 그런 뜻이다. 송림제화에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 문헌으로 본 등산

국내에서 암벽등반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됐다. 1926년 5월 영국인 아처와 한국인 임무(林茂)가 북한산 인수봉을 암벽타기로 등정, 근대적 의미의 등반시대를 처음 열었다. 그로부터 70여년이 흐른 77년 고 고상돈씨가 한국일보의 지원을 받아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봉인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다.

순수한 등반의 효시는 신라시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최초의 해외원정 등반은 역시 신라의 승려 혜초(慧超)의 구법여행이다. 혜초는 723∼727년 중앙아시아, 즉 오늘날의 파미르고원, 힌두쿠시산맥 등 불교권 지역을 순례하면서 세계적 문화유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는데 구법순례기인 이 저술은 해외원정등반기록의 의미도 지닌다.

등산은 주로 걷는 레저활동이다. 좋은 등산화가 필수적이다. 그래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산행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 특히 등산화가 발에 맞지 않을 경우 하산길에 발가락이 신발 앞쪽으로 쏠려 신체의 하중을 제대로 받아내기 어렵다.

밑창에 징이 박힌 나겔 등산화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일제강점기 송림제화가 간간이 만들던 등산화도 밑창에 징을 박은 것이었다. 쇠징 등산화는 산길에서 미끄러지거나 벼락이 칠 경우 감전위험도 컸다고 한다. 이제는 밑창을 고무로 처리해 가볍고 바위에 착 달라붙는, 이른바 비브람화가 등산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무창을 개발한 이탈리아인 비브람의 이름을 딴 등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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