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달콤하지만, 지날수록 쓰디쓴 것이 복수다'(프랜시스 베이컨), '용서만큼 완벽한 복수는 없다'(조쉬 빌링스), '잘 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다'(탈무드). 많은 철학자와 책은 복수를 말린다.물론 이런 말도 있다. '누군가 아내를 꼬여 간다면, 그녀와 평생토록 살게 하는 게 가장 큰 복수다'(사차 기트리)는 시니컬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며, '친절은 복수보다 고상하다'(셰익스피어)는 인간의 가식을 한 겹 벗겨내는 동시에 손에 먼지 묻히지 않고 마음 속으로 복수하는 법을 일러준다. '인생이란, 복수에 대한 열망이다'(폴 고갱)는 말을 떠올려 보면, 복수란 인간 감정의 필연적 요소인 모양이다.
'올드 보이'는 '복수만큼 용서를 재촉하는 것은 없다'(스콧 아담스)는 전제를 충족하기 위해 나온 영화 같다. 물리적으로, 혹은 마음 속으로라도 약간의 복수심이나 분노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용서는 존재할 수 없다. 네오와 스미스가 등식의 구성요소이듯, 용서란 복수심이 전제돼야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복수 이후의 용서나 화해가 아니라 복수 이전이다. 사람들은 왜 복수심을 가질까. '올드 보이'는 복수란 타인의 행위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자기의 은밀한 치욕에 대한 상쇄 욕구라고 말한다. 우진의 치밀한 복수에 처음 '맞짱'을 뜨던 오대수는 이렇게 말한다. "넌 누나와 잤다". 그러나 우진은 자는 그 순간,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죄악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우진은 내면의 죄의식을 끄집어 내어 '발설'(發說)한 그 자를 모든 죄의 원천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오대수가 말만 하지 않았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길가다 부딪친 사람에게 복수심을 갖긴 힘들다. 어느 아주머니가 버린 구정물을 뒤집어 써도 그건 일방적 사고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의 가난을 아는 자의 입에서 무심히 튀어나온 "없는 것들…", 나의 무식을 동정했던 이가 내뱉은 "못배운 것들…"은 아프기 짝이 없다. 그가 말을 하지 않았다고, 나의 가난과 무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나 그가 그것을 발설하는 순간, 모든 과오는 그의 것이 된다. 때문에 '말' 때문에 빚어지는 복수극에 희생당하지 않으려면 아는 것을 줄이고, 말도 줄여야 한다. 이렇게.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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