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완회(許完會·49)씨의 첫 인상은 뜻밖에 만만치 않아보였다. 미간에 깊이 잡힌 주름에다, 쏘아보는 듯한 눈매, '댁하고는 그다지 볼 일이 없다'는 식의 툭툭 던지는 짧은 말투…. 평생 여대생들만을 상대로 일을 해왔으니 얼마나 나긋나긋하랴(심지어 성격이나 외양이 어느 정도는 중성화하지 않았을까)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일하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 나서야 그가 온통 여자들 세계 안에서 남성성(이 단어에 오해가 없길. 원래의 천성을 얘기하는 것이다)을 고스란히 지켜올 수 있었던 연유를 깨달았다. 그는 단순한 구두 수선사가 아니었다. 제 일과 능력에 더없이 당당한 장인(匠人)이었다. 그러니 듣기 좋은 말이라도 던져가며 누구에게든 굳이 잘 보이려 애쓸 필요가 없다. 판사가 판결로만 말하고, 기자가 기사로만 말하듯 그 역시 손님이 만족할만한 결과물만 내어주면 될 뿐이니까. 서비스업 종사자답지않게 별로 곰살맞지 않은 태도에도 불구, 그가 30년이 넘도록 이화여대 가족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온 이유다.
그걸 알아챈 내색을 하고서야 그와의 대화는 비로소 제대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허완회씨의 솜씨는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오랜 시간 그의 좁은 '작업실' 한 켠에 옹색하게 앉아 지켜보는 일이 전혀 지겹지 않았을 만큼. (구두 수선도 그렇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고무판을 크기에 딱 맞게 잘라내는 건 단 한칼이다. 망설임 없이 구두 뒷굽의 곡선과 직선을 따라 칼이 순식간에 한바퀴 돌아가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인 양 한치의 들고 남이 없다. 그러니 엄지손톱 크기만한 뾰족구두의 뒤축을 박아넣은 일쯤이야 몇 초랄 것도 없다. 수백가지 굽들이 담긴 플라스틱 소반을 뒤져 적당한 모양과 크기를 찾아내는 시간이 더 길 정도니까. 바닥의 이음새까지 찢어져 '저건 좀 쉽지 않겠다' 싶은 것도 창을 뜯어내고 재봉틀로 꿰매고 순간접착제와 본드를 '부위'별로 발라가며 새 구두로 복원해내기까지 손놀림에 전혀 거침이 없다.
"끙끙대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됩니다. 그건 기술이 변변치 않음을 손님에게 대놓고 공표하는 거에요. 어려운 일도 쉬워 보이게 하는 것, 그게 진짜 기술자지요." 구두 뿐 아니라 살 부러진 우산, 끈 끊어진 핸드백 따위가 얘기 한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눈 앞에서 거짓말처럼 원래의 모양을 되찾아 나온다.
손님들은 끊임없이 찾아 들었다. 물론 대부분이 이화여대 재학생(남자친구의 구두까지도 챙겨온다)과 교수, 직원들이다. 그 뿐 아니다. 지방에 사는 졸업생에 유학이나 이민 떠난 동문들까지도 벼르고 별러 한 보따리씩 들고 찾아온단다. 잠깐 시간을 내 급하게 택시를 타고 왔다는 직장인 졸업생은 "다른 데서 해도 결국은 여기서 다시 손보게 된다"며 숨을 몰아 쉬었다.
온갖 공정이 입력된 컴퓨터 공작기계처럼 묵묵히 거침없는 손놀림을 해대는 그가 간혹 학생에게 물을 때도 있다. "이건 어떻게 해줄까." 대답은 다 비슷하다. "몰라요. 아저씨가 알아서 해주세요." 자칫 미묘한 손질 한번 잘못에 가치가 사라질 수도 있는 명품구두인데도. 수선을 맡겼다 찾아갈 때도 고친 부분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냥 들고 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쯤 되면 거의 절대적인 믿음의 관계다.
허씨의 일터는 이화여대 본관 맞은편의 교내 노천카페 '아름뜰' 옆이다. (그는 자기가 먼저 자리잡았으니 '구두수선소 옆 아름뜰'이 맞다고 정정했다) 두평 남짓한 이 공간에 들어온 건 1990년. 그러나 이대생들의 구두를 손보기 시작한 건 그보다 20년 전이다. 전북 남원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어른과의 인연으로 학교 정문 바로 앞의 '전통구두방'과 '신신구두방'에 취업해 일을 배웠다. "처음부터 구두수선에 특별한 뜻을 두었던 건 아닙니다. 단지 기술 하나만 확실하면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지요." 학생들이 주인으로 착각할 만큼 실력을 쌓은 뒤 상경 다섯해 만에 인근에 '이화사' 간판을 달고 독립했다. 워낙 귀신같은 솜씨로 당시 인기 TV시리즈물에서 딴 '이대 맥가이버' 명성을 얻은 것도 이 때다. "축제 때 쌍쌍파티의 파트너 제안도 받을 정도였다니까요." (70년대 유명했던 이대 쌍쌍파티에 초대된다는 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80년대 말 도로확장으로 가게가 헐리면서 경기 광명시와 서울 명동에서 잠깐 점포를 열었다가(그가 이대를 떠난 건 이때 1년 반 남짓 뿐이다) 학교의 제안을 받았다. "학생 편의를 위해 교내 구두수선소를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업자 여럿이 싸 들고 경쟁했던 모양입디다. 제겐 학교에서 수소문 끝에 먼저 연락해왔어요. 교직원들이 다를 저를 떠올렸던 모양이에요. 고민도 했지요. 맘대로 쉬지도 못하는 등 족쇄를 차는 게 아닐까 하고."
이 곳에서 허씨는 교수가 되고 학부형이 된 예전의 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바로 옆 이대부중의 선생님이 된 졸업생들은 구두를 고치러 오면서 제자인 아들의 학교생활 얘기를 함께 가져오기도 한다. "이대 가족과 오래 지내면서 '작은 공인(公人)'이 된 느낌마저 들어요. 어딜 가도 졸업생들과 마주치거든요. 부산역 대합실에서, 흑산도 등지의 여행길에서 '어머, 아저씨'하는 반가운 인사에 자주 놀라지요. 그러니 행동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 학생들에게 실수하는 모습을 보일까 봐 술도 가급적 학교주변을 피해 마십니다."
그토록 이화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가 학교를 떠날까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단다. 4년 전부터 생계가 곤란할 정도로 일감이 줄어든 때문이었다. 불황 때문이 아니라(수선업은 불황 때 더 잘되는 법이다) 학생들 옷차림의 변화 때문이었다. "찢어진 청바지, 힙합패션에 예쁘고 여성스러운 구두가 어디 어울립니까? 온통 운동화에 워커 같은 캐주얼신발 차림이니 고쳐 신을 일이 없었지요."
얘기를 들은 졸업생들이 만류하고 나섰다. "한번은 미국서 다니러 온 김에 구두를 고쳐간 졸업생이 이튿날 공항에서 전화를 했습디다. '곰곰 생각해 봤는데 폐업은 말고 인터넷이라도 활용해 활로를 찾아보지요.' 눈물이 핑 돌면서 책임감 같은게 생기더라구요." 다행히 올 들어서는 치마 차림, 특히 미니스커트나 정장패션이 다시 늘면서 조금씩 사정이 풀려가고 있단다.
아무래도 지난 3∼4년 고생의 한이 단단히 맺힌 듯 얘기는 '옷차림과 태도론'으로까지 흘렀다. (동의하든 안하든 그건 독자 몫이다) "단정하게 짧은 치마를 입으면 예쁘기도 하지만 자세부터 함부로 할 수 없어요. 자연히 언행도 깔끔하고 조심스러워지게 마련이지요. 무조건 편한 차림새만 찾다 보면 자칫 어린 아이들처럼 버릇없거나 방자해집니다." 내친 김에 잘됐다 싶어 요즘 여학생들에 대한 험담을 은근히 부추겼다. 나이든 이들에게는 예전이 항상 더 좋았던 법이니까. 그런데 맥 빠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요즘 학생들도 모두 예뻐요. 한창 외모가 피어나고 애교도 많을 때 아닙니까.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게 다 예뻐요."
― 그래도 과거하고는 차이가 있을 텐데.
"글쎄요, 프라이드는 예전이 더 대단했던 것 같고…. 일과 결부해 얘기하자면 전에는 엄마가 신던 구두를 가져와 고쳐 신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일은 없지요. 또 신발 사이즈도 보통 240∼250㎜로 처음 제가 일하던 때보다 한 10㎜는 더 커졌어요. 발 모양도 억압받지 않아서 그런지 시원시원하게 더 예쁘고…."
이러니 이 질문은 접을 수 밖에. 그렇지않아도 졸업생들이 그 동안의 에피소드들을 엮어 책 한번 써보라고 권유들 하는데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쓰려면 솔직해야 하는데 그러면 안 좋았던 얘기들도 다 해야 하는데…. '우리 학교'인데 그럴 수는 없지요." (사실 '여대생들과 보낸 30여년'만큼 흥미진진한 소재가 있으랴. 그런데도 기사가 재미없어진 건 순전히 그의 이런 '학교사랑' 때문이다)
허씨는 말미에 자신의 직업에 떳떳하지 못했던 적이 딱 한번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고향처녀인 아내를 만나 처가에 처음 인사를 갔을 때다. 구두수선업을 선뜻 말하지 못하고 '구두방이라고 할까?'하며 망설였단다. 결국 솔직하게 얘기했지만 잠깐의 그 순간을 그는 오랫동안 부끄러운 기억으로 갖고 있다.
"여성의 구두는 예술인데다 완벽한 복원은 창조보다도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하는 일도 예술이지요. 게다가 돈 받으면서도 고맙다는 얘기까지 듣는 직업이 어디 흔합니까? 제 일에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캠퍼스에 어둠이 내려앉고 찾는 이도 뜸해질 무렵 학생 하나가 바삐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저녁식사는 하셨어요? 전 도서관에 가는 길이에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허리를 펴는 그의 얼굴에 첫 인상과 다른 행복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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