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이라는 말이 오지의 이미지를 넘어 야성의 울림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덕유산과 지리산의 굵은 심줄이 맞부딪치는 힘에 울퉁불퉁 융기한 준봉들이 즐비하고 그 주름살을 비집고 마을들이 섰으니, 안 가본 이들조차 '오죽할까' 했던 것이다. 그 한풀이랄까. 고속도로가 놓이고 길이 좋아지면서 '못난이 삼형제'로 통하던 그 무주 진안 장수 3개 군이 최근에는 전국에서 가장 생기찬 변화의 세월을 맞고 있는데…. 그래도 산이고 골은 그대로여서, 국도에서 비껴 서면 '아! 이래서 무진장이구나'하게 되는 마을이 없지는 않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 성암마을도 그 가운데 하나여서, 골이 깊어 토종 산골의 맛을 지켜온 덕에 연전 농협중앙회의 생태마을에다, 농림부의 녹색농촌체험마을, 문화관광부의 문화역사마을에 겹겹이 지정되는 행운을 안았던 것이다.면소재지에 들어 길을 묻자 장수 주민들 조차 '엄청 산골인디…'하며 한 수 접는 눈치다. 몇 차례나 묻고 물어, 꺾어 든 곳은 봉화산 초입. 구비를 돌면 산사(山寺)가 길을 막고 섰을 법한 산길을 10여분 가량 올랐을까. 산 중턱 옴팡한 골짜기에 마을이 보인다. 북두칠성에서 가장 빛나는 복덕성 별빛을 껴안은 자리라 복성리로 부르다가, 1968년 길목의 주암리와 합쳐 성암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흥부 놀부가 태어난 마을(남원 아영면)이 저그 재 너머 안 있소? 흥부가 재산 모도 뺏겨 불고 쫓겨와 살던 디가 여그 우리 동네요." 하지만, 박에서 나온 도깨비들이 지어줬다는 '주란(朱欄) 화각(畵閣) 반공(半空)에 솟고 동산아래 너른 들에 팔괘(八卦)놓아 엔담 칠(박타령)' 만한 흥부네 고대광실 집 자리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다만 팔구월 찬 서리에 박이 여물기 전, 부황 들었던 그네 살림이야 마을 사정과 맞춤이라, 정순생(59) 이장은 "산 자락에 다랑 다랑 매달린 손바닥만한 논밭이 마을 농사의 전부"라고 했다. 30여 가구 70여명 주민 가운데 50대는 이장을 쳐서 5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60대 이상 고령자. 손 모내기에 소 쟁기질이 힘에 부쳐 두어 해 전부터 아랫마을에서 이앙기며 콤바인을 부르는데, 올라오는 길이 험한 데다 한 두락에 한 마지기도 안 되는 논이 대부분이라 기계 삯을 마지기당 만원씩 얹어주는 판이다. "대여섯 마지기 농사지어 아들딸네 한 가마씩 보내고 나면 영감 할멈 일년 때꺼리도 달랑달랑허제." 장재원(76)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뭐 먹고 사냐고 묻더라며 웃었다. 오종종하게 무릎을 맞댄 집들은 뒤란마다 벌통을 여나믄 개 씩 챙겨두고 있었고, 흙바람벽엔 '다마는 잘아도 씨 없이 달고, 공기가 맑아 때깔이 곱다'는 곶감들이 서너 접 씩은 매달려 꾸들꾸들 말라가고 있었다. 지난 해 번암면―남원 아영을 잇는 산복도로가 닦이기 전까지는 재너머길 20리, 아랫길 40리를 지게지고 다니며 돈을 샀을 물건들이다. 마을 앞 길이 콘크리트로 포장된 게 3년 남짓 전이지만 아직 노선버스도 없고, 생긴데야 이제는 탈 사람도 없다. 그나마 길이 좋아진 뒤로는 급한 일이 생기면 왕복 1만6,000원에 택시를 부르거나, 마을에 세 대 있는 경운기를 이용한다고 했다.
실댁(70)네가 메주 절구를 찧는다는 소문. 어지간한 박물관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나무 둥치를 파서 만든 절구 확을 논실댁이 잡고, 공이는 귀가 어두운 고모(87)가 잡았다. 공이를 찧는 탄력이며 솜씨가 '인간문화재'감이라고 너스레 떨며, 터진 방앗공이에 보리알 끼듯 껴들자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찧던 콩떡을 한 움큼 건넨다. 아직 가마솥에는 삶은 콩이 한 솥이고, 산 마을 하루 해는 하마 기울 참이니 콩이나 먹고 잠자코 있으라는 듯. 얼떨결에 받아 든 콩을 입으로 가져가기도 전에 두 할머니의 방아는 리듬을 되찾고 있었다.
마을이라고 새마을 운동의 시멘트 바람이 전혀 안든 것은 아니지만 60∼70년대 산촌 모습이 아직은 적잖이 남아 있었다. 출세한 아들네가 보내 준 석유보일러를 놓은 집도 있지만, 아직은 싸릿대나 관솔가지 주워 군불 때는 집이 대부분이다. 이장네 내외도 기름값이 어디냐며 보일러 있는 안방 대신 군불 때는 건넌방에서 겨울을 날 참이라고 했다. 문짝도 없는 측간에서 구덩이에 변을 본 뒤 아궁이에서 퍼 온 재로 버무려뒀다가 마실 길에 삽으로 떠다 밭에 던져놓는 일도, 순환농법이니 뭐니 하며 호들갑을 떨 일도 없이, 응당 해 온 일이다. 마을 어귀에는 농협이 생태마을로 지정하며 건넨 돈으로 주민들이 직접 물레방아를 만들어 달았는데, 마을의 관록에 동화한 탓인지 2년 새 물 때가 반지르르 앉아 있었다.
"이나마 남은 산촌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번암면-에서 나서 성암마을에 뿌리를 내린 최근호(53)씨는 "연로한 어른들 다 가시고 나면 마을이 어찌 되겠느냐"고 했다. 몇 해 전에 장수군이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에서 마을 발전 컨설팅을 받았는데 권영근 소장이 마을의 생태적 가치에 반한 일도 있었단다. 해서, 의기투합한 주민들이 내건 기치가 생태체험마을이다. 농림부에서 2억원, 문화부에서 1억원을 타 낸 주민들은 마을 바로 아래 천둥지기 1,200여 평을 마련, 한옥 민박 동을 짓기로 했다. 조상들이 마을에 주춧돌을 놓을 때부터 줄곧 살았던 귀틀집도 짓는데 억새 이엉으로 지붕을 얹고, 전기·보일러 대신 호롱 등잔에 구들 온돌을 놓기로 했다. 운이 풀리려던 것인지 그 돈으로 어림도 없을 5량 한옥(건평 51평)과 귀틀집, 우사, 돈사, 측간 건축을 한국목조건축 평생교육원 김헌중 이사장이 선뜻 맡겠다고 나섰다. 흥부네 고대광실에 못지 않을, 마을에서 가장 넓고 우람한 민박동은 이미 상량을 끝내고 기왓 자리를 잡는 중이었고, 귀틀집도 지붕 방수 마감작업이 한창이었다. 넉넉잡아 두어 달 이면 민박동 공사가 마무리될 예정. 흥부전의 박타령은 성암마을의 오늘을 예견한 '비결(秘訣)'이었는지 모른다.
/장수=글 최윤필기자walden@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 생태마을 추진위원장 서문수씨
"하드웨어는 이미 갖춰진 셈이고, 이제는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이 남았어요." 성암 녹색생태마을 추진위원장을 맡은 서문수(59·사진)씨. 그래서 우선 생각한 게 숯가마다. 민박동 아래에 숯가마를 만들어 마을의 20년 숯가마꾼 임상규(68)씨에게 맡겨둔다는 것. 참숯 굽는 모습도 보이고, 숯 장사도 하자는 계산. 봄에는 봉화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철쭉이며 진달래로 화전을 굽고, 가을에는 곶감을 함께 깎고, 겨울에는 짚풀로 닭우리며 씨오쟁이(씨앗보관통)도 엮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주민들이 대대로 손에 익혀 온 것들이어서 당장 시작해도 되겠기 때문이다. 머루 다래며, 오미자를 심어 철 따라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한방편이고, 도시민들과 함께 칡을 캐다가 달여도 먹고, 찧어 짜서도 먹고, 그냥 씹어도 보는 건 어떨까 생각 중이지만, 산을 탈 일이 조금 버겁다.
마을에서 타낸 정부 지원금은 모두 3억원. 서씨는 하지만 100억원을 타서 쓰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게 모두 국민 세금을 얻어 쓰는 일인데 잘해야지요. 책임감을 느낍니다."
교직생활을 하다가 건강 때문에 25년 전에 솔가해 성암마을에 들어 요즘은 사슴을 키우는 서씨다. 그는 이 날 민박동 공사장 마당에서 벌어진 삼겹살 바비큐 얻어먹은 빚으로 사슴 한 마리를 잡기로 약속했다. 그나 주민들이나 툭하면 수조원(2조5,000억원이 투입된다는 현대투자신탁 매각 본계약 체결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다) 단위로 노는 공적자금 '도깨비놀음'은 아예 외면하고 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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