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경제의 기간(基幹)이자 혈맥인 금융을 외국인들의 손에 넘겨줄 것인가. 미국 푸르덴셜 금융그룹의 현투증권 인수를 계기로 '금융주권'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외국 금융자본의 국내진출은 글로벌경제 시대에 우리경제의 대외 신인도를 제고하고 금융서비스를 선진화한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이다. 외국 금융기관의 철두철미한 수익중시 경영은 국내 금융산업의 고질인 '관치'의 폐해를 줄이는데도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문제는 속도와 수위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하루아침에 금융산업의 주도권을 내줄 경우 경제치안이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 이것이 최근 논란의 진원지다. 한국금융연구원 주최로 29일 열린 금융기자단 초청 세미나에서도 외국자본의 국내 금융시장 지배 문제를 둘러싸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에서 나타난 논점들을 중심으로 외국자본 진입확대의 파장과 대응방안 등을 짚어본다.외국자본 국내공략 득실은
토론 참석자들은 대체로 외국자본의 유치가 국내 금융산업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데는 공감했지만 외국자본의 과도한 시장장악에 대해서는 강한 우려감을 표시했다.
주제발표자인 금융연구원 강종만 선임연구위원은 "외국자본의 국내 은행업 진출은 은행산업의 경쟁촉진과 서비스 개선의 이점이 있지만 부정적 영향도 많다"며 "특히 금융시장 불안정시 외국계 은행은 단기적 이익에 치중한 나머지 독자적 행동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 시스템 리스크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강 위원은 이어 "외국계가 국내은행 진출을 확대할 경우 '고객 편중'의 부작용도 예상된다"며 "외국계는 대체로 대기업 및 부유층만을 주고객으로 할 가능성이 높아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과 서민에 대한 자금공급이 위축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금융감독원 이인욱 조사연구국장은 "글로벌경제 시대에 외국자본의 진입을 놓고 이분법적인 찬반논쟁을 벌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중요한 것은 외국자본의 공략이 확대될 경우 우리 스스로 어떤 충격도 이겨낼 수 있도록 기초 체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에 진출하는 외국자본의 성격이 외환위기 직후엔 투기성펀드가 주를 이뤘으나 최근엔 본격적인 금융기관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옥석'을 구분할 때가 됐다는 의견도 많았다. 금융연구원 최장봉 박사는 "펀드는 단기수익만을 추구하다 보니 조기철수 등으로 시장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경향이 짙다"며 "앞으로 외국자본이 국내은행을 인수할 때는 심사과정에서 전문경영능력과 경력을 반드시 평가해 투기펀드의 은행경영 참여를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종만 위원도 "과거 멕시코나 남미국가의 경우 투기펀드들이 은행을 인수했다가 고수익을 거둔 뒤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국가경제에 치명상을 입혔다"며 해외펀드의 은행업 진출에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다.
외국자본 금융지배 막을 대안은
외국자본의 무차별적인 시장공략을 막을 방법은 무엇인가. 금융감독위원회의 한 국장은 사견임을 전제, "국내에 금융기관을 인수할 여력이 있는 주체는 현실적으로 재벌 등 산업자본 밖에 없다"며 "국내의 알짜 금융기관들이 해외자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제는 국내 산업자본의 금융진출 족쇄를 없애 '역차별'을 해소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금융연구원측은 국민연금 등 연·기금을 외국자본의 '대항마'로 내세우는 방안을 제시했다. 강 위원은 "국내 은행산업은 장기적으로 순수 국내계, 절충형, 순수 외국계의 3개 그룹이 상호견제와 균형을 통해 경쟁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며
"이를 위해선 정부 소유 은행의 민영화 과정에서 정부의 은행지분을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에게 이전하는 방안 등을 다각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 외국계 점유율 실태
외국자본이 국내 금융시장에 본격적으로 입성하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다. 1998년 자본시장의 완전개방을 의미하는 외국인투자촉진법 제정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실제로 96년까지만 해도 국내 금융업에 대한 외국인의 직접투자(누계)는 19억 달러에 불과했으나 6년 뒤인 2002년에는 무려 104억 달러로 불어났다.
최근 들어 외국자본의 국내 공략은 은행, 보험, 증권 등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전방위적이다. 국내 금융시장의 주축이라고 할 은행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단기차익을 노린 국제적 펀드들의 격전장이 되다시피 한 상태. 1999년까지 6%대에 머물던 외국계 은행의 국내 은행시장 점유율(총자산 기준)은 2000년 뉴브리지캐피탈의 제일은행 인수, 칼라일의 한미은행 지분참여 등으로 18.9%로 껑충 뛰어올랐고 최근 미국의 사모펀드 론스타가 외환은행의 최대주주가 되며 26.7%로 확대됐다.
주식시장을 통한 간접투자도 활발해지면서 시중은행의 외국인 지분율 역시 알리안츠(하나은행 8.16%), 뱅크 오브 NY(국민은행 9.4%), BNP파리바(신한지주 4.0%) 등을 포함해 올들어 26.3%로 늘어났다. 더구나 최근에는 펀드뿐 아니라 HSBC, 씨티뱅크, 스탠다드 차터드 등 세계적인 대형은행들 역시 국내은행 인수전에 가세, 외국계의 영향력 확대는 갈수록 가속화할 전망이다.
올 3월 현재 브릿지, 메리츠 등 20여개 합작법인 및 현지법인이 활동중인 증권업계는 외국계의 점유율이 주식위탁거래대금 기준으로 14.5%에 달하고, 외국계 생명보험사의 국내 보험시장 점유율 역시 외환위기 이후 꾸준히 증가해 3월말 현재 10.5%에 이르고 있다.
주식 및 채권시장의 수요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간접시장에서도 외국자본의 바람이 거세다. 최근 미국 푸르덴셜 그룹이 현투증권과 자회사인 현투운용을 인수함으로써 국내 투신시장에서 외국계의 점유율은 35%대로 높아졌다. 푸르덴셜이 이미 공언한 대로 제일투신운용까지 합병하면 외국계 비중은 40.40%까지 확대된다. 이외에도 마젤란펀드로 유명한 세계 최대의 뮤추얼펀드운용사인 피델리티가 내년 국내 진출을 앞두고 있어 간접시장 판도가 외국계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카드업계 1위 LG카드의 해외매각이 추진되고 있는데다 국내 최대 상호저축은행인 한솔저축은행이 미국계 펀드인 퍼시픽림펀드에 팔리는 등 서민 대상의 소비자금융 시장에서도 점차 외국자본의 장악력이 증대되는 양상이다.
/변형섭기자
■뭉치는 토종자본
외국자본의 국내 금융기관 독식현상이 심화하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한 토종 자본의 결속 움직임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계 한 관계자는 "현재 민영화가 추진되고 있는 우리금융그룹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며 "현재 국내 금융전업그룹의 경우 자금력이 마땅치 않아 여러 가지 대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내 금융기관이 줄줄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국내 기업금융의 총대를 메고 있는 우리금융마저 외국자본에 팔려간다면 국가 금융정책이 마비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기관투자가와 개인 등을 대상으로 대규모 투자 펀드를 조성, 우리금융 지분매입에 참여하는 등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LG카드마저 외국인들이 눈독을 들이자 국내 금융기관에서 투자자의 돈을 모아 이를 인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금융기관 뿐 아니라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무방비로 노출된 국내 기업을 방어하기 위한 움직임도 증권업계를 중심으로 일고 있다.
KTB네트워크 권오용 상무는 "토종기업이 해외에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장기적 관점에서 지분을 사는 투자회사가 필요하다"며 "거대한 외국인 '큰 손'에 버금가는 한국 투자회사를 육성하는 것만이 산업과 가계가 살고 국부유출도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400조원에 달하는 부동자금을 산업 자금화하려면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가 투자업에 관심을 갖고 금융의 지렛대 역할을 해줘야 한다"며 "기관이 앞장서면 개인들도 따라 올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에셋증권도 최근 1,000억원 규모의 프라이빗 에쿼티펀드(사모펀드의 일종)를 만들어 기업구조조정이나 M&A 시장 등에서 적극 운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현주 사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전체 주식의 40%를 차지했는데, 투자자산을 운용하는 투신운용사마저 외국인들이 지배하면 한국 자본시장은 물론 기업들도 외국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자본주권(資本主權)이 없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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