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바람둥이 그 묘한 마력 인기 "바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바람둥이 그 묘한 마력 인기 "바람"

입력
2003.11.27 00:00
0 0

"첫 번째 잘못은 나를 만난 것이오. 두 번째는 내 말을 귀담아 들은 것이고 세 번째는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도 떠나지 않은 것이오." 영화 '스캔들'에서 주인공 조원(배용준)은 차갑게 변한 연인의 표정에, 자신에 대한 사랑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지는 숙부인(전도연) 앞에서 도리어 그 죄를 묻는다. 어찌 사랑이 변하냐고 묻는 듯한 숙부인의 슬프고 간절한 얼굴에 대고 내뱉는 말은 "당신이 날 사랑한 순간, 내 사랑이 변하더이다." 그 눈빛이란. 시리즈로 제작된 KT 전화 CF에서 김래원은 순정파 여자와 섹시하고 거만한 여자 사이를 오가는 바람둥이다. 지난 번에는 "한 시간만 통화하자"며 애타게 전화기를 부여 잡는 여자를 매몰차게 내치더니 이번에는 다시 사랑을 구한다. 귀찮고 재수 없다는 표정은 어디 가고 애절한 얼굴로 "한 시간만 통화하자"고 한다. 분명 잔인하고 못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력적이다. 왜 이들에게 '상종 못할 인간'이라고 돌을 던지지 못하는 걸까. 여자들조차도.

바람둥이=백치미?

드라마, CF, 영화 속에서 바람둥이는 요즘 가장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바야흐로 바람둥이 전성시대다. 남자의 바람기는 죄악이고 여성 시청자는 드라마 속 바람 난 남자에게 공분하며, 그 비극적 결말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시절과 달리 요즘 바람둥이는 미워할 수가 없다.

모토로라 휴대폰 CF에서 정우성은 임자 있는 여자에게 날렵하게 생긴 휴대폰을 건네며 유혹한다. 하지만 모범적인 가장으로 등장했던 CF에서보다 그는 멋있어 보인다.

여성들은 요즘 바람둥이에게서 '백치미'를 느낀다고 한다. '지능이 모자란 듯 표정 없는 데서 느끼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보통 여성들 앞에 붙었던 말이다.

연예전문 케이블 TV Etn의 박은미(27)씨. "똑똑하고 완벽하고 멋있지만 애정 문제에 있어서만은 바보죠. 나사 하나 빠진 듯하고 눈치 없고…. 우유부단형 바람둥이는 여자가 나서서 정리해 줘야 할 것 같고 그래서 귀엽죠." 바람둥이를 길들이고, 그 허술함을 채워 주고 싶은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한다는 얘기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반대 버전 쯤일까?

'스캔들'의 조원은 철저한 자기애에 둘러싸여 사랑에 초연한 듯 행동했지만 결국은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장애를 지녔고, CF 속 김래원도 사랑에 있어서는 절름발이다. 최근 종영된 '상두야 학교가자'(KBS2)에서 비는 사모님 꼬셔 먹고 사는 제비지만 불치병 걸린 딸 보리의 입원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왜 요즘 바람둥이인가

바람둥이는 다수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데 바람둥이가 자꾸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왕자님'에 질린 때문이다. 게다가 바람난 사회는 '여름향기'(KBS2)의 송승헌처럼 멋있고 완벽한 남자가 보여주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KT 전화 광고를 기획한 휘닉스 커뮤니케이션즈의 노호정 주임은 "요즘 사회 분위기는 바람둥이를 나쁜 남자로 몰아가는 분위기라기보다는 오히려 매력적으로 받아들인다. 당당하게 바람 피우는 사회 아닌가. 유쾌하고 미워 보이지 않는 바람둥이는 도리어 호감을 준다"고 설명한다.

바람둥이가 좋은 소재가 되는 것은 생생하고 살아 있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디어비평 단체인 미디어세상 열린사람들의 윤혜란 사무국장은 "드라마나 영화가 스토리보다는 주인공의 인간적 매력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흠 없는 왕자나 악하기만 한 주인공은 더 이상 인기가 없는 것 같다.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몹쓸 놈'이지만 알고 보면 인간적 따스함이 넘치는 바람둥이 캐릭터가 자꾸 등장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 여자는 왜 바람둥이에게 끌릴까?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섹스&시티'의 주인공 캐리는 잘 생기고 능력 있지만 책임감 없고 바람둥이인 애인 빅(사진)과 헤어진 후 가정적인 가구 디자이너 에이든을 만난다. 마침내 원하던 이상형의 남자를 만났지만 그는 끝내 빅을 잊지 못한다.

여자들은 왜 바람둥이에게 끌릴까? 많은 여성은 친절하고 바람도 피지 않을 것 같은 착한 남자보다는 예의 없고 거칠게 자란 남자를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미시간 대학 부설 연구기관인 ISR가 여대생 257명을 대상으로 "착하고 순한 남자와 나쁘지만 매력적인 남자 중 누구와 연애를 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나쁜 남자를 선택한 사람이 3분의 2에 달했다.

수 많은 연애 입문서는 일명 '못된 남자 증후군'이라는 여성의 독특한 취향에 대해 언급한다. '못된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 사랑에 무책임한 남자'(2001)에서는 '못된 남자는 사탄의 유혹과 같다'고 한다. 바람둥이형 남자에게는 확실히 여자를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있지만 오래 행복감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자를 단조로움에서 끄집어 내 준다. 책에서 언급한 못된 남자의 대표적 행동 유형으로는 1)불성실하다 2)이기적이다 3)즉흥적이다 4)자유분방하다 5)버릇없다 6)매정하다 순이다.

그렇다면 이런 유형의 남자를 인생의 동반자로 고려하겠다는 여자들의 속셈은 무엇일까. 그들은 '그는 변할 수 있다' '그는 여자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니까'라는 이유로 못된 남자의 여자가 되려 한다. 즉, 제멋대로인 남자를 내 손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그리고 바꿀 수 있다는 의지가, 못된 바람둥이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여자는 항상 남자가 변하기를 바란다.

혹자는 이를 '섹시한 아들 가설'로 설명한다. 본능적으로 많은 자녀를 원하는 여성은 성적 매력이 넘치는 자손을 얻기 위해 섹시한 바람둥이에 눈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둥이 남자를 성실하게 바꾸겠다는 노력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해피엔드는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욕망의 진화― 인간 짝짓기의 전략'의 저자이자 텍사스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부스는 '남녀는 각각 얼마나 많은 섹스 파트너를 원하느냐'에 대해 조사한 결과 여성은 보통 1년에 한 명의 파트너를 원하지만 남자는 8명을 원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남녀는 역시 다르다. 교훈은 이것이다. 매력적인 바람둥이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다.

/최지향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