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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3>이인로 VS 이규보-두 시대의 충돌과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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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3>이인로 VS 이규보-두 시대의 충돌과 균열

입력
2003.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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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 아래 깨진 술판열 아홉 살의 청년 이규보는 1186년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런 제안을 받았다. "우리 모임의 오세재(吳世才)가 경주에 놀러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자네가 그 자리를 메워주겠는가?" 이담지의 초대에 대해 이규보는 "칠현(七賢)이 조정의 벼슬입니까? 어찌 빈자리를 보충한단 말입니까? 혜강( 康)·완적(阮籍) 뒤에 그들을 계승한 이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비꼬듯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던져진 '춘(春)'과 '인(人)' 두 자를 운으로 삼아 시를 지었다.

'영광스럽게도 대 아래 모임에 참석하여(榮參竹下會)/ 유쾌하게도 독 안의 봄에 자빠졌네(快倒甕中春)/ 알지 못하겠네 칠현 가운데(未識七賢內)/ 누가 오얏씨를 뚫은 분이신지(誰爲鑽核人)'

이 시는 동석자들을 대단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는 무신란(1170년) 이후 진나라 죽림칠현을 본뜬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던 이들 문인들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짓밟은 것이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이 자기 집 오얏나무 씨를 남이 가져다 심을까 봐 오얏을 먹은 후 늘 송곳으로 씨를 뚫어서 버렸다는 고사를 끌어와 시비를 걸었으니 말이다.

이규보 스스로 작성한 '백운소설(白雲小說)'의 현장보고서에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인로는 아마도 배알이 뒤틀렸을 것이다. '어린놈이 재주만 믿고 까부는군. 우리를 이따위로 비웃다니!' 그러나 이규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나하게 취해 거만한 태도로' 나와 버린다.

고려 전기와 후기의 경계에 살던 두 사람, 각각 문벌귀족과 신흥사대부를 대표하는 문학사의 라이벌 이인로와 이규보는 이렇게 만났다. 35세 이인로와 19세 이규보의 만남, 12세기 말 고려 문인지식인 사회의 상징적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술판이 깨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문벌 귀족과 신흥 사대부

대나무 아래로 이규보를 초대한 문인들은 이른바 죽림고회(竹林高會) 멤버들이었다. 오세재, 임춘(林椿), 황보항(黃甫抗), 조통(趙通),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그리고 이인로(李仁老). 나이로는 오세재가 좌장이었지만 문학으로는 이인로가 대변인 혹은 대표였다. 이들은 모두 고려사의 분수령이 된 무신란으로 몰락한 옛 문신귀족의 후예들로 '무부(武夫)'들이 지배하는 현실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죽림칠현이 그랬듯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의 정신을 지니지는 못했다. 이들은 애초에 확고한 세계관적 선택에 의해 죽림에 자리 잡은 인물들이 아니라 무인들의 칼날에 밀려 쓴 잔을 마시고 있던, 한때는 '잘 먹고 잘 살던' 세력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죽림(竹林)은 옛 영화를 동경하는 공간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곳은 무신들이 지배하는 개경의 풍림(楓林)을 향한 욕망이 감춰진 모순된 공간이었다. 이들의 냉소는 아마도 개경을 향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명종 10년(1180년) 과거를 통해 이미 관직에 나가 있던 이인로는 이들 가운데 풍림을 향한 욕망을 가장 먼저 실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규보의 출신 성분은 문벌귀족이었던 경원 이씨의 후예 이인로와는 전혀 달랐다. 부친 윤수(允綏)가 호부낭중(戶部郞中)이라는 재경 관료의 지위에 있었던 것이나 고향 황려(여주)에 조상 전래의 가전(家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 이규보는 막 개경으로 진출해 조금씩 기반을 형성해 가던 신흥 세력의 일원이었다.

스물 세 살 때 예부시(禮部試)에서 낮은 등수로 뽑힌 것이 못마땅해 사양하려고 했다가 부친에게 크게 꾸중을 당한 일화도 이 같은 집안의 성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이규보에게 문벌귀족에 대한 적대의식, 나아가 강한 현실지향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지녔던 이인로와 이규보의 충돌,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 귀족과 신흥사대부의 충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용사와 신의―두 시대의 충돌

이들의 라이벌 관계를 잘 드러내는 것이 문학창작 방법론이다. 최자(崔滋)는 '보한집(補閑集)'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인로는 "나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황정견, 소식 두 사람의 문집을 읽은 뒤에 말이 굳세고 운이 맑은 소리를 내게 되었으며 시 짓는 지혜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규보는 "나는 옛 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신의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두 사람이 들어간 문이 다르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같은 문으로 들어가 다른 문으로 나왔다는 것이 최자의 생각이었다. 옛사람의 문장과 뜻을 읽고 배우는 것은 같지만 이인로는 옛사람의 문장과 문체를 갈고 닦아 자신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상태를 지향했고, 이규보는 답습을 넘어 생경하더라도 새로운 뜻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최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이 바로 '용사(用事)'와 '신의(新意)'라는 다른 문이다.

본래 한문학은 정해진 틀이 있는 규범적 문학이기 때문에 용사 없이는 시를 창작할 수 없다. 하지만 용사만으로 창작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도 없다. 규범적 한시에서나 자유로운 현대시에서나 새로운 뜻의 표현, 새로운 의미의 발견은 시의 당연한 이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인로가 용사만이 아니라 신의를 말했고, 이규보가 신의만이 아니라 용사를 언급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인로가 용사를 강조하고 이규보가 신의를 중시한 차이를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들어간 문이 아니라 나온 문이고, 나온 문의 차이야말로 그들의 정치적 위치나 세계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규보가 친구 전이지(全履之)에게 보낸 답장에서 "소동파의 시를 읽고 좋아해서 해마다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들이 모두 올해에 또 서른 명의 동파가 나왔다"고 떠든다고 했듯 당대의 주류 시풍은 소동파 따라가기였다. 이인로 역시 '보한집'에서 "문을 닫아걸고 깊이 틀어 박혀 황정견·소동파를 읽은 후에야 말이 힘차고 운이 또랑또랑해져 시를 짓는 삼매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소동파 본받기를 일삼고, 또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당대의 시풍이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이규보는 시는 뜻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은 그 다음인데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말을 꾸미는 일에만 공을 들인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규보는 용사에 대해 글 도둑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과거에 묶인 이인로, 내달리는 이규보

용사와 신의, 두 창작방법론은 적어도 이들의 시대에는 방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에게 그것은 그들이 속한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관직을 위해 자기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구 귀족 이인로가 보수적 용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면 현실을 긍정하면서 자신 있게 내달리던 신흥 사대부 이규보는 신의라는 칼날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라이벌의 대결은 어쩌면 이미 승부가 결정되어 있는 한 판이었다. 어느 세계에서나 구세대는 신세대에게 밀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구세대가 새로운 현실에 대안을 제출하지 못할 때 패배는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두 중세 지식인을 부딪치게 했던 용사와 신의에 대한 우열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대에 있어 우열은 분명했다. 이인로와 그의 시대가 이규보와 그의 시대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이인로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조현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이인로(李仁老)

1152년에 나서 1220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에서 인종까지 7대 80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던 경원(인주) 이씨의 후예이다. 정중부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칼날을 피했다.

5년 후 환속하여 경대승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명종 10년(1180년)에 장원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지만 구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죽림고회를 결성해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했다.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은대집(銀臺集) 후집(後集) 쌍명재집(雙明齋集) 등 문집이 여럿 있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아들 세황이 엮은 우리나라 첫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뿐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년에 나서 1241년에 별세했다. 막 서울로 진출하기 시작한 중소지주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동(奇童)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주가 있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는 별명이 말하듯 두주불사,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또 침입한 몽골군을 진정표(陳情表)로 물리칠 정도의 문장가였다. 젊어서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는 시를 쓰기도 했지만 명종 20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간 후 최충헌의 환심을 사서 출세길에 오르면서 현실 비판이 약해진다. 백운소설(白雲小說), 동명왕편(東明王篇) 등 그의 작품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모두 정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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