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3> 오빠는 내 영웅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3> 오빠는 내 영웅

입력
2003.11.26 00:00
0 0

1942년 3월12일, 인천 소래 포구에서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따라 돌림자인 '상(商)' 자를 넣은 이름 대신 정자(正子), 그러니까 일본식으로는 마사코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세상에 나와 첫 울음을 터뜨린 그 순간 대문에는 빨간 고추가 달린 금줄이 내걸린다. 자고로 아들이 태어나면 짚으로 꼰 금줄에 고추와 숯 그리고 솔방울을 끼우고, 딸아이를 낳으면 숯과 솔방울만 끼워넣는 게 조선의 법도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싱글벙글하며 대뜸 금줄에 붉은 고추를 끼워 넣으라고 이른다. 아들 하나를 본 뒤 내리 딸 셋을 본 터에 또 딸을 낳았으니 적지 않게 서운할 터. 그러나 아이 아버지는 전에 없이 흡족해한다.내가 태어난 날의 풍경이다. 둘째 언니에게서 전해 들은 이 이야기 말고 아버지를 추억할 만한 게 실상은 없다. 네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부재는 그렇게 크다. 하지만 어렸을 적 나는 큰 외로움을 모르고 자랐다. 열한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상호 오빠가 아버지를 대신했고 상임, 상옥, 상애 언니가 늘 곁에 있었던 까닭인 듯 싶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린 여동생들이 줄줄이 있었던 우리 집에서 오빠는 가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삼대 독자이던 오빠는 조숙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조숙함에 예술적 감성과 재능을 함께 갖춘 오빠는 어릴 적 내게 영웅 그 자체였다. 오빠가 인천 경동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운동회에 따라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밴드부에서 활동하던 오빠가 아코디언을 불며 운동장을 돌았는데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빠는 국립극단의 전신인 신협에 들어갔다.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던 오빠가 극단에 들어간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극작가이면서 명망 높은 연출가이던 서항석 선생을 찾아갔던 오빠는 "감독이 되려면 연기력부터 길러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영화를 하려면 연극을 알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거다. 그날로 오빠는 신협을 찾아갔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하던 오빠가 신협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냈다. 자손이 귀한 집 외아들이 힘든 연극판에 뛰어들어 '딴따라'로 사는 걸 어머니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극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버팅기는 오빠의 고집을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오빠가 연극계에 몸담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어머니는 오빠를 앞세우고 연극계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제자로 삼아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로 열성적인 후원자가 됐다.

그런 어머니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한 걸까, 상호 오빠는 20대 초반부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였다. 오빠는 신협 시절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 윌리 로만의 아들 버다드 역으로, 린다 역을 맡은 최은희씨와 같이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게 인연이 돼 신상옥씨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후 스물다섯 살 어린 나이에 '해정(海情)'이라는 영화로 감독으로 데뷔한 오빠는 1965년 자신의 대표작이자 한국 영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비무장지대'를 만들었다. 전쟁 중 고아가 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로 오빠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더군다나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흔 살에 영화계를 떠나기 전까지 오빠는 15년 간 24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2001년 4월 국립영상자료원에서 개최한 '원로 감독 회고전'에 오빠가 초청됐으나 대표작 '비무장지대' 등 대부분이 분실돼 곤경에 처했었다. 하지만 덕분에 어렵게 찾아낸 '남남북녀' '시댁' '해방동이' 세 작품에 내가 출연한 영화 두 편을 보태 전무후무한 '남매전'으로 행사를 치렀다.

국내 최고의 극단이던 신협에서 활동했고 영화감독으로 활동한 오빠를 뒀다는 건 내게는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시 최고의 배우들이 모여있는 분장실을 들락날락거릴 수 있었고 입장권 없이도 마음껏 연극을 볼 수 있었던 건 모두 오빠 덕택에 주어진 일종의 특권이었다. 게다가 덤으로 영화 시나리오도 실컷 읽을 수 있었다. 오빠가 감독으로 활동하던 시절 집에는 수북하게 영화 시나리오가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배우 수업을 받았던 셈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