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요? 뭐 개지랄 같은 영화 찍던 시절이었죠. 가만 보자, 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했으니까 60, 70, 80… 몇 년이야. 참 오래 해먹었네. 아직도 도태되지 않고 기자들 만나 이렇게 씨부렁거리는 게 참 용하네." 대개 어눌하게 시작하는 임권택(67) 감독의 말은 늘 진솔한 자기 겸양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임 감독이지만 그의 '자술'은 언제나 순박하게 시작해, 열정적으로 끝을 맺는다. 추석 직후 만났던 그는 "추석 때 맛있는 것 많이 자셨냐"는 질문에 "이 나이가 되면 뭣을 먹어도 맛난 게 없어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나이와 상관 없이 영화에 대한 그의 욕망은 여전하다.
부천판타스틱 세트장에 60, 70년대 명동 거리를 재현한 '하루인생' 세트장에서 다시 만난 임 감독.
"나는 주기적으로 액션을 다루는 감독이다. '장군의 아들'로 90년대 액션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점검했다면, 이번에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요즘 액션은 기예화되어 있는 격투놀이다. 급소를 맞고도 또 일어나 싸우는 식이다. 이번에는 실제 쌈판에서 볼 법한 사실감을 영화에 담고자 한다."
이런 액션을 굳이 58년부터 시작, 70년대에 이르는 '복고' 시대에 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패한 자유당, 무능한 민주당, 5·16 이후의 군사정권을 겪으며 별 생각없는 깡패가 도리없이 세상의 탁류에 휘말리게 되는 얘기다. 그런 세상에서 그래도 세상을 맑게 하는 것은 맑은 인성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임 감독 영화의 시나리오는 영화가 끝날 때야 완성된다. 대강의 줄거리를 작가들이 그날 찍을 분량만 시나리오로 꾸민다. 현장에서도 정일성 촬영감독의 목소리가 더 크다. 조명도 알아서 하고, 소품도 담당자들이 알아서 한다. 자유방임형이다. 디테일하다 해서 봉테일(봉준호), 박테일(박찬욱)로 불리는 젊은 감독들에 비하면 감독으로서의 입김이 덜해 보인다. 그러나 임 감독과 일하는 사람들이나 임 감독 스스로의 말은 똑 같다. "겉으로만 그런 것"이다. 그렇게 풀어놓아도 결국 '임권택 식' 영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99번째 영화다. "허투루 찍은 영화까지 쳐서 그렇게 되는데 그게 뭐 의미가 있는가. 나 스스로는 기술시사와 기자 시사가 끝나면 영화를 보지 않는다. 보고 있으면 속이 끓어서 그런다. 저 장면은 왜 저렇게 했을까, 부지불식간의 실수를 보고 있기 힘들다. 다른 사람들은 포만감이 있다는데 나는 그런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다."
100번째 영화는 '상류인생'을 담아볼 것이냐 물었다. "난 상류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요. 그러니까 제목을 그렇게 달면 '저 새끼는 하류인생 찍어놓고 상류인생이라 그런다' 욕하지 않겠소?"
/부천=박은주기자 jupe@hk.co.kr
제작 이태원(65), 감독 임권택(67), 촬영 정일성(74), 조명 김동호(63), 소품 김호길(62), 음악 신중현(63). 평균 연령 65.6세. 영화 '하류 인생'은 '환갑 넘은 청년들'이 만들어 가는 영화다.
임권택 정일성 이태원 등 '노익장 3인방'은 '서편제' '춘향뎐' 등 굵직한 한국 영화를 만들었고,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취화선'이 상을 받으면서 각별한 관계가 일반 상식이 됐다. 하지만 조명기사 김동호, 소품담당 김호길씨 두 사람은 숨은 조역이다.
김동호씨가 1978년 '무립대협'의 조명감독으로 데뷔해 240여 편의 영화에 참여했고, 김호길씨는 64년 '식모'로 데뷔해 약 200 편에 이르는 영화에서 활동했다.
58년부터 71년까지의 시대상을 그리는 '하류인생'은 특히 소품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호길씨는 68년 '돌아온 왼손잡이'(주연 박노식 김지미)로 임 감독과 처음 만나 '만다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학창시절부터 영화포스터, 표어에서 시작해 약갑, 담뱃갑, 껌포장지, 돈 등 닥치는 대로 모으는 수집광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모았으나 세 번이나 창고에 불이 나는 바람에 많이 소실됐다. 그러고도 '에덴의 동쪽' '공처가' '하오의 연정', 임 감독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등 소장한 영화 포스터가 '하류 인생'의 소품으로 멋지게 쓰이고 있다. 활명수, 이명래고약, 생과자 등의 소품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심장 질환으로 한동안 일을 쉬기도 했으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내 되돌아 왔다. 빠른 손은 그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컴퓨터로 복사해 그 자리에서 학교나 관공서에 걸리는 액자로 만들고, '가래침 뱉는 곳에 결핵균 날뛴다" 같은 옛날 표어도 순식간에 만들어낸다.
김동호씨는 임 감독의 데뷔작에서 엑스트라 배우로 인연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액션 영화 '비내리는 고모령' 등에서 조명 부기사로, 그리고 '취화선'에 이르러 조명기사로 임 감독과 다시 만났다. "나는 여전히 신세대들과 겨룬다는 젊은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이제는 스태프들이 조명을 받을 차례"라며 작품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
음악 감독을 맡은 '록의 대부' 신중현씨에 대해서는 "신 선생 외에는 다른 사람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이 '백발 청년들'이 조승우와 김민선 두 주연배우를 제외한 160여명의 출연진을 모두 신인으로 채워 내년 칸 영화제를 겨냥해 불꽃 촬영 중이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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