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는 신목을 섬기는 아우타족을 전멸시키고, 주술의 힘이 강한 이 부족의 기운을 봉인하기 위해 신검을 꽂았다. 1,000년 후 통일신라 말기, 국운은 기울고 전란이 빈번해지며 나라는 오로지 무신 비하랑(정준호)의 고군분투로 겨우 유지된다. 전쟁에 회의를 느낀 비하랑은 시골 처녀 자운비(김효진)와 소박한 삶을 꿈꾸지만, 그는 또 다시 전장에 불려 나간다. 때를 틈타 자운비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들이 닥치고 자운비는 우연히 잡초 덤불 사이에 있던 신검을 뽑은 후 신목이 있던 자리에 채워진 천년호에 몸을 던진다. 아우타족의 영혼이 서린 자운비가 살아나 복수극이 시작된다.'천년호'는 역사와 판타지를 결합한 야심만만한 프로젝트다. 이야기 구성이 그다지 빈약하지도 않고, 중국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한 화면도 나름대로 공 들인 흔적이 보인다. 장군 정준호도, 순박한 시골처녀에서 요괴로 변한 김효진의 연기도 어색하지 않다. 자운비의 몸에 깃든 요괴를 물리치기 위한 퇴마 과정이나, 두 주인공의 사랑도 꽤 볼 만하다.
그런데도 '천년호'는 포만감을 주지 못한다. 아우타족의 모습은 '단적비연수'에서 본 듯하고, 악령 들린 자운비의 모습은 오래 전 발표된 '백발마녀전' '천녀유혼' 등 중국 판타지 사극이 보여준 신들린 여성의 이미지를 깨뜨리지도 못했다. 판타지야말로 '남들만큼 해냈다'가 아니라 '남들과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장르임을 생각하면,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영화가 주는 결핍감이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알 만하다.
사극 판타지, 혹은 판타지 사극이 대단한 규모의 궁궐이나 막대한 인력 동원보다는 상상력과 구체적 표현력이라는 다른 무기를 갖춰야 하는 장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영화다. 28일 개봉.
/박은주기자 jup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