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8월 전주 군수 이삼응은 부서면에 사는 이경선이 자신의 부인과 싸운 후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17일 조사를 위해 출동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우선 이경선의 부인 장씨를 심문했다. 나이 35세였다. "네 남편과 무슨 일로 다투었는지 자살인지 아니면 타살인지, 남편과 결혼한 지 얼마나 되는지, 자식은 몇인지 남편의 나이는 또 몇 살인지, 무슨 물건으로 목을 매었는지 사실대로 말하여라." 장씨 부인은 무능한 남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 몸은 매우 빈한하여 술을 팔아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런데도 제 남편은 항상 도박과 술로 세월을 지새웠습니다. 지난 14일에도 술 팔아 번 돈을 도박에서 모두 잃었습니다. 서로 다툰 후 남편은 외출했고 닭이 우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와 밥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잠이 들었다가 날이 밝아 깨어보니 남편이 허리띠로 서까래에 목을 매어 죽어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 이웃사람 이광숙에게 부탁하여 끈을 풀어 내렸지만 이미 죽었습니다. 결혼한 지는 17년 째이며 그 동안 1남 2녀를 낳아 기르고 있습니다. 목을 맨 허리띠는 경황이 없어 불에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시신을 검험(檢驗·현장에 나가 시체나 상처를 확인하는 일)하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염을 하려고 관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사람이 죽었는데 관에 알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언뜻 봐서도 시체는 자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흉측한 몰골이었다. 충분히 타살을 의심할 만했다.
40대 중반의 남자 시신은 머리를 북쪽으로, 다리를 남쪽으로 하고 누워 있었다. 오작사령(시체를 다루는 관비) 유덕만을 시켜 차례로 옷을 벗겼다. 신장은 5척1촌이었고 풀어진 머리카락을 재 보니 1척5촌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두 손은 주먹을 쥐고 있지 않았으며 다리는 곧게 펴고 있었다. 방이 좁아 실내에서 검험할 수 없어 밖으로 옮겨 더 자세히 살폈다. 눈동자는 튀어 나와 있었고 청흑색으로 부풀어 오른 복부를 두드리니 소리가 났다. 배꼽 아래는 청홍색을 띈 채 크게 부어 있었고 뒤집어 항문을 보니 역시 돌출해 있었다. '증수무원록언해'의 중독사 조항과 너무 흡사했다. 독살이 분명했다.
추호도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장씨 부인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시 그를 심문했다. "너를 도와 목을 맨 남편의 시체를 풀어 내린 이웃 이광숙의 진술을 들어보니 네가 이미 수년 전부터 박사권과 간통하는 사이로 부부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으니, 네가 박사권과 내통해 남편을 모살한 것이 아니더냐. 꾸며대지 말고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장씨 부인도 거침이 없었다. "제가 술장사를 하기로 우연히 박사권을 알게 되어 간통하였는데 동리에 소문이 나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예 올 7월에는 박사권과 함께 도망가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 생각이 나고 남편과 사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8월14일 남편이 만취해 "내 반드시 박가 놈을 잡아 죽이고 말 테다"며 술을 연거푸 마셔댔습니다. 사건 당일 밤에도 술을 마시길래 저도 옆에서 한 잔 마시고 지난날의 잘못을 빌고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박사권에 대한 원한을 풀지 못하고 이렇게 목을 매 죽고 말았으니 자초지종을 모르겠나이다. 깨어나 보고 당황하여 우리 집에 기숙하던 김국서와 이웃사람 이광숙을 불러다가 남편을 끌어 내리고 참기름을 먹여보는 등 구활하려고 했으나 이미 절명한 뒤였습니다. 제가 일찍 남편의 자진을 보았더라면 어찌 말리지 않았겠습니까? 박사권과 논의하여 남편을 모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나이다."
이웃 이광숙과 대질심문도 이어졌다. 장씨 부인과 이광숙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먼저 이광숙이 장씨 부인을 보고 말했다. "당신이 지난번에 나한테 그러지 않았소. 남편이 박사권과 간통한 일 때문에 자주 때리므로 술에다 양잿물을 타 먹였다고. 내 분명히 들었소." 그러자 장씨 부인은 이광숙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면서 "네 놈이 지금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근거도 없는 소리를 해대느냐"며 큰소리를 질렀다. 얼굴에는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간통남 박사권의 사주입니다
초검 당시 발뺌을 일삼던 장씨 부인은 하지만 복검(復檢) 때 뜻밖에도 진술을 번복하고 독살을 시인했다. 간부(姦夫) 박사권의 사주라는 것이었다. 항상 남편을 살해하면 평생 같이 살 수 있다던 박사권이 양잿물을 주면서 술에 타서 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부부의 인정상 곧바로 죽이지 못하다가 드디어 15일 밤 결행했다는 진술이었다. 과연 박사권의 사주가 사실일까?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장씨 부인을 믿을 수 없는 데다 문제의 박사권은 도주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기가 수월치 않았다. 박사권을 잡을 때까지 사건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2년 뒤 드디어 박사권이 체포됐다. 이경선 살인 사건의 범인 및 증거들에 대한 보충 수사를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백한 장씨 부인과 사건 관련자들은 그 동안 옥에 갇혀 있었다. 전주 군수는 박사권에 대한 심문에 들어갔다. 그리고 장씨 부인의 진술이 모두 거짓이라는 진술을 얻어냈다. 박사권은 고리대금업자로 장씨 부인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종종 만나 통간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장씨 부인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잡혀갈지 모른다고 생각해 도망갔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경선을 죽이려고 장씨 부인에게 독약을 주거나 사주한 일은 전연 없다는 주장이었다. 장씨 부인이 무고한 사람을 물고 늘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진술을 들이대고 장씨 부인을 다시 추궁하자 그는 또 말을 바꾸었다. '박사권의 사주'는 이웃 이광숙이 시켜서 꾸며댔다는 것이었다. 이광숙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박사권이 독약을 주면서 남편을 죽이라고 사주했다고 하면 도망 간 박사권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쓸 테니 그리하라고 했다는 말이었다.
아니 도박 빚 때문에 자살했나이다
전주 군수는 더 이상 거짓으로 꾸며대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장씨 부인은 또 다른 진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편 이경선이 원래 도박 빚이 많아 이를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것이 틀림없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짓 증언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조사자인 진산 군수 서상경에게 사건이 넘어갔다. "너는 어찌하여 초검 때는 남편이 자살하였다고 하고 복검 때는 박사권의 사주로 양잿물을 먹여 살해한 것이라 했느냐. 그것도 모자라 전주 군수의 질문에는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 빚을 져 이를 비관하여 목을 매었다고 거짓말을 늘어 놓았느냐. 이제 더 이상 꾸며댈 생각말고 이실직고하라."
진산 군수는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하지만 장씨 부인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소리뿐이었다. 게다가 장씨 부인을 도와 이경선의 사체를 서까래에서 풀어 내렸던 이광숙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 사이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이광숙은 장씨 부인의 독살을 주장한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수사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 됐다. 형편을 파악한 장씨 부인은 이제 거칠 것 없이 자신은 무죄이고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진산 군수는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장씨 부인의 행동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증이나 증언이 확보되지 않으면 의법 처리할 수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진산 군수는 단지 장씨 부인과 박사권을 엄벌하도록 요청하는 선에서 사건 조사를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관들은 장씨 부인을 범인으로 확신했지만 수 차례의 검시와 대질 심문 그리고 관련자 체포와 재조사를 통해서도 확실한 증거와 자백이 나오지 않아 결국 그를 범인으로 확정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처럼 인명(人命)이 관련된 사건의 경우 함부로 조사를 끝내거나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의문이나 의혹을 남김 없이 풀어 원통함이 없도록 하려는 인정(仁政)의 원칙이 확고했다. 이 사건과 달리 서울대 규장각의 검안(檢案) 가운데 검시를 통해 살인사건의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거나 또는 범인을 확정했던 사례들이 상당수 있다. 이 역시 당시 조사가 그저 형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증거 확보나 과학적인 조사 등 조선시대에도 법 집행에서 현대에 못지 않게 인권을 중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글 김 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그림 이철량 전북대 교수
은비녀 입에넣어 검게 변하면 "독살"
오늘날은 살인 사건 검시에서 해부가 기본이다. 독살 여부도 해부를 통해 채취한 시료를 독물학 검사로 확인하므로 과학적으로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체의 외형 검사를 우선하고 추가로 은비녀를 이용해 독살 여부를 판단했다.
조선시대 수사·검시 지침서인 '증수무원록언해' 중독사 항목은 독극물 때문에 죽은 사람의 모습을 '독살당한 시체는 입과 눈이 모두 열려 있고 얼굴이 검붉은 빛이거나 청색이다. (중략) 특히 전신이 청흑색을 띠며, 입술은 부어오르고 터지기도 하며, 손톱 끝은 검게 되고, 목구멍과 배는 부풀어 올라 검은색을 띤다. 피부가 부풀어 오르고, 몸에 푸른 반점이 생기며, 눈동자가 튀어 나오며, 입 코 눈에서 검붉은 피가 나기도 한다. 죽기 전에 오물을 토하거나, 항문이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대장이 돌출하는 현상 등이 나타난다'고 묘사했다. 또 독살이 의심되는 경우에는 은비녀를 목구멍에 넣어 검게 변하는지도 확인했다. 당시 흔히 쓰던 독약인 '비상'은 비소와 황의 화합물이어서 은의 색깔을 검게 바꾸는 성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반계법(飯鷄法)이란 독극물 검사법이다. 독살이 의심되는 시신의 입에 찹쌀로 지은 밥을 넣었다가 닭에게 먹여 닭이 죽는지 살피는 방법이다. 시신의 위 내용물을 쥐에게 먹여 이상이 나타나면 독성 물질을 본격 조사하는 현대의 독극물 예비검사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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