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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너희들이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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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너희들이 고맙구나

입력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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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 범아 보아라. 지금쯤 현이는 태평양에서, 범이는 인도양에서 함선을 타고 거친 파도를 가르고 있겠구나. 벌써 가을이 깊었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이곳 사무실 진입로 양쪽에는 은행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황금 빛 융단을 펼쳐놓은 듯 하다. 저 멀리 두승산 능선에는 변산반도 쪽으로 기울어 가는 석양의 낙조가 만추의 서정을 한껏 자아내는구나.현이, 범이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교육청 부설 야영장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 숙직실 뒤 공터엔 배추, 무, 시금치, 상추가 청정하고 싱그럽게 잘 자랐구나. 지난 여름 뙤약볕 아래서 땀 범벅이 되어 맨땅을 일구고 씨를 파종해 정성껏 가꾼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올해는 김장도 하려고 고춧가루도 넉넉하게 빻아 놓았다. 며칠 전 운동장 곁 포플러 낙엽을 쓸어모아 태우다 보니 문득 우리 삼부자가 겪었던 아픈 세월의 잔영이 낡은 흑백사진처럼 떠오르더구나.

'국가 충성 조직'에서 무장 해제된 채 실의와 좌절의 늪에 빠져 허탈한 발길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아버지에게 유일한 희망은 너희 형제뿐이었다. 아버지는 한때 삶을 포기할 생각도 했다.

그 때마다 초등학생이던 너희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버지, 학교 다녀 왔습니다!"하며 달려들던 모습에서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너희들은 우등상, 전교 마라톤 1등상, 전교 씨름왕상을 받아와 아버지 앞에 수줍게 내밀었지.

어머니가 없어도 씩씩하게 커가는 너희가 정말 고마웠다.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그래 너희들 만큼은 혼신을 다해 끝까지 밀어주마"하고 다짐했지. 너희들은 온갖 역경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서로 의지하고 격려해 국립 해양대학에 나란히 진학했지. 너희들이 합격 통지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뿌듯했다.

얼마 전 졸업식장에서 너희들은 후배들의 헹가래를 마다하고 "아버지, 고맙습니다"하며 달려와 나를 와락 안아 주었지. 너희들의 떡 벌어진 가슴팍이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하던지…. 젊음이 있기에 꿈이 있고, 노력하고 발전하는 너희들에게 아버지는 "고맙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하겠더라. 늠름하고 의연한 항해사가 되어 오대양을 누비는 너희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한없이 행복하구나. 박수를 보낸다. 현아, 범아, 사랑한다.

/이대춘·전북 정읍시 정읍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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