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악터널 옆 좁다란 산길을 올랐다. …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발목에 쇳덩이와 연결된 쇠사슬을 차고 힘겹게 발길을 옮기는 죄수 같은…. 멀리 돌계단이 보이면서 이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걷는다는 생각에 머리 속이 무거웠다. '저 돌계단이 현실과 비현실의 삶을 갈라놓는구나. 저 위에 현실을 초월한 세계가….' 발걸음을 멈췄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나 무당 안 할래. 우리 그냥 돌아가자. 응? 돌아가." …무당이 된다는 건 그렇게 두렵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내림굿을 하러 산을 오르는 순간까지 안간 힘으로 버텼다. 아니, 한창 굿이 진행되는 중에도 방울과 부채를 바닥에 내던지며 악을 썼다. "나는 절대 무당을 할 사람이 아니야. 난 싫어!" 그러나 그 세계에서 그것은 애당초 죽음으로밖에는 거부할 길 없는 운명이 아니던가.
열두해 전 봄 그는 그렇게 무당이 됐다. 그리고 평생 그토록 떨쳐내려 애썼던 삶의 고통을 비로소 껴안았다. 제 것 뿐 아니라 똑같이 나약하고 미욱한 다른 이들의 삶까지. 그가 날선 작두 위에서, 혹은 수천 관중 앞 무대 위에서 추는 춤은 그래서 절절한 해원(解怨)의 몸짓이다. 이해경(李海京·47)씨 얘기다.
이해경씨의 이력은 실로 다양하다. 그는 황해도 만신(여자무당의 높임말이다) 김금화(金錦花)의 신딸이자 그가 예능을 보유하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서해안풍어제 및 대동굿 이수자다. 뉴욕 링컨센터 등지에서 벌써 30차례가 넘는 해외공연을 통해 우리 전통민속을 알려오고 있다. 파리의 프레타 포르테 무대에서도 한판 굿을 펼쳤다. 국내에서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비롯한 숱한 대형무대에 섰다. 월드컵 축하공연, 춘천마임축제, 밀레니엄행사 등. 가야금의 황병기(黃秉冀), 타악기의 김대환(金大煥), 마임의 유진규(柳鎭奎)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과 소설가 이외수(李外秀)씨 등이 그의 정신적 후원자들이다.
서울 한남동 작은 연립주택 거실 한쪽에는 CD가 빼곡히 꽂혀있다. 딥 퍼플, 레드 제플린, 주다스 프리스트, 메탈리카 같은 헤비메탈 음반들이다. 못 말리는 록 매니아지만 요즘엔 척 맨지온 등의 재즈음악도 자주 듣는다. 그래서 굿과 국악, 록과 재즈를 접목하는 크로스오버 공연도 자주 시도한다. 대학 등에서 강연도 하고, 더 넓은 무속의 이해를 위해 인도의 신이나 몽골의 샤먼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기도 한다. 이런 무당이 그 말고 또 있을까?
이씨는 강신무(降神巫)들이 대개 그렇듯 참으로 신산한 삶을 살았다. (요즘에야 돈 버는 기술만 가르치는 '무당학원'도 있으니) 같은 연배의 전후세대가 한두가지씩 나눠 겪었을 불행을 이씨는 작은 한 몸으로 모조리 감당해야만 했다. 그의 삶에서 묘하게 시대적 상징성이 느껴지는 이유다.
그는 1남5녀의 셋째딸이다. 처음 기억하는 집은 서울 충무로의 판자집 문간방이다. 어머니는 '큰집'을 따로 둔(말하자면 본처가 있는. 당시로선 별로 드문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작은집'이었다. 어머니는 편물 일거리를 가져오거나, 시장에 좌판을 벌여 끼니를 댔다. 주인집의 술지게미로 고픈 배를 달래면서도 이씨는 소공녀의 세라 같은 행복한 반전을 꿈꿨지만 현실이야 그런가. '큰집'에서 공부시켜 주겠다며 데려간 언니가 비탈길을 오르며 쌀자루 배달하던 모습, 중학교 때 괜찮은 형편을 기대하고 가정방문을 왔다가 차갑게 돌아선 담임선생님, 그로 인해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혀 고통스러웠던 학교생활…. 그의 아픈 기억들이다. (가난한 서로의 가슴에다 왜 그렇게들 상처를 냈는지 모를 일이다. 다들 힘겹던 시절에)
고교에 진학해서는 학교를 빼먹고 명동 바닥을 헤매는 날들이 많아졌다. 록 음악은 그의 유일한 피난처가 됐다. '딸라골목'(암달러상이 많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의 어두운 카페 '예스' 등지에서 하루종일 하드 록에 취해 지냈다. 어떻게든 공부시키려는 어머니의 바람에도 대학의 꿈은 일찌감치 접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중에 우연히 만난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겨우 스무살 때다. 계모 밑의 무능한 의처증 환자, 그와의 만남은 지독한 악연이었다. 시어머니의 학대에 시도 때도 없는 남편의 폭행…. 집에서는 물론 생계를 위해 나선 시장통에서, 어렵게 차린 재봉소에서, 양재기술을 배우러 다니던 학원 등지에서 참혹하게 맞는 나날이 이어졌다. 자살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고 혼절한 그를 행상이 발견했다.
사실 이씨는 어린시절 불구인 동생을 보냈을 때부터 웬지 죽음이 가까이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 뒤로 여러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며칠씩 가위눌림의 공포에 시달렸다. 아마도 앞으로 걸어갈 삶의 징조였으리라. 스물일곱 때는 삶의 유일한 빛이던 다섯살바기 아들을 병으로 잃었다. 두번째 자살을 기도한 게 그 때다.
이후 이씨는 살아야할 이유를 찾기위해 전국의 산하를 떠돌았다. 그러면서 이를 악물고 일을 해 작은 봉제하청공장도 차렸다. 묘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 꿈에서 공장의 누가 아프면 아침에 아파 결근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너 다리나 부러져라"하고 농담을 던지면 얼마 뒤 그가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 손님으로 찾아간 점집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손님들의 깊숙한 사연이 입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 즈음 송광사 스님에게서 얘기를 들었다. "출가했으면 큰 중이 됐을텐데…. 한이 너무 많아 중 되기는 틀렸고, 큰 만신이 될 듯 싶소." 그 뒤로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기이한 인연이나 과정은 상술할 필요가 없겠다. 어차피 우리로선 이해 못할 저 너머 세계의 이야기이므로.
무당이 되면서 이씨는 남편과의 악연도 털어냈다. 새와 같은 자유를 얻기까지는 그러나 또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제 '능력'에 대한 자만에 빠지고, 돈만을 위한 굿판도 벌이고, 뒤늦은 사랑에도 잠깐 빠져 보았다. 돌고 돌아 세상사의 부질없음을 깨달은 뒤에야 마침내 제대로 된 무당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 제대로 된 무당의 길이라는 게 뭡니까.
"진정한 삶의 조언자, 또는 상담자가 되는 거지요. 누구나 살면서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럴 때 의지와 용기를 주고 바른 선택을 돕는 것이지요. 예전 본래의 사제(司祭) 역할입니다. 무당은 굿이나 해서 돈 버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존재지요."
― 무당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접신에 의해 생성된 힘입니다. 말하자면 예지력 같은."
― 귀신이란 게 정말 있습니까?
"글쎄요. 나약한 인간이 바라는 상징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생면부지자에게 공수(무당이 무아지경에서 내뱉는 말이나 행동)를 한 뒤 그가 '어떻게 돌아가신 아버님과의 밀약까지 아느냐"며 놀랄 때는 다른 걸로 설명하기 힘들어요."
― 만약 있다고 하면 무당이 모시는 신과 종교적 신은 어떻게 다릅니까.
"다신(多神)체제로 봐야지요. 하느님, 알라, 천지신명 등은 지역적·문화적 호칭의 차이일 뿐, 세상 전체를 주관하는 동일한 신입니다. 어찌 보면 감히 근접할 수도, 쉽게 경험할 수도 없는 절대자지요. 무당이 모시는 건 그 하위체계의 신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일상의 자잘한 일까지 털어놓고 상담을 구할 수 있지요. (이 기발한 신관·神觀을 서울대 종교학과 특강에서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고 했다)"
― 그렇다면 무당이 종교인으로 대접 못 받는 이유가 뭡니까.
"체계적인 내세관이 없기 때문이지요. 또 상업적으로 타락한, 정신적 조언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무당들의 잘못이 큽니다. 남의 불행을 볼모로 돈벌기에 급급하거나, 작두타기 같은 신성한 의식조차 차력시범이나 이벤트처럼 합디다. 무당 스스로가 격(格)을 올려야 합니다."
이해경씨는 시종 열정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외모는 소녀처럼 작고 여려보이는 데도. 그의 꿈은 서울 한복판에 성당이나 교회마냥 번듯한 신당(神堂)을 세우는 것이다. 이름하여 '넋두리의 집'. "힘들고 고달픈 이들이 찾아와 마음껏 넋두리를 하며 해결책을 찾고 상처를 아물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어요."
그는 최근 황병기 선생의 부인인 소설가 한말숙(韓末淑)씨의 권유로 자전적 책을 펴냈다. 고통과 분노의 세월을 눈물로 기록한 '혼의 소리, 몸의 소리'(솔과학)다. "돌이켜보면 다 예정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당이라도 남을 도우려면 뭘 알아야지요. 겪어보지도 않고 그들의 어려움이나 아픔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를 단순히 예술 좀 하는 무속인 정도로만 보는 건 잘못이다. 극한의 삶을 이겨내고 이젠 넓게 열린 가슴으로 세상에 베풀 준비가 돼있는 사람, 그래서 그는 아름답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사진=류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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