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1월22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위원장 이재문이 서울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사했다. 47세였다. 이재문은 경북 의성 출신이다. 영남일보, 대구일보를 거쳐 1960년 4·19혁명 뒤에는 진보적 일간지 민족일보의 정치부 기자를 지냈다.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 때 옥고를 치른 그는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도피 생활을 하던 중 1976년 2월 신향식·김병권 등과 함께 남민전을 결성했다.1979년 10월 구성원들의 일제 검거로 세간에 알려지게 된 남민전에 대한 평가는 여러 겹이다. 북한 정권과의 관련은 없었지만, 이 단체가 당시 남한의 유사 파시즘적 자본주의 체제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도시게릴라전을 막연하게나마 구상했다는 점에서, 그 모험주의적 좌편향이 비판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초헌법적 긴급조치로 경영되었던 유신체제의 너절한 폭압성을 생각하면, 이들의 비현실적 좌편향을 어떤 절망의 분출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민전 사건은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조직 사건으로 발표되었고, 이재문은 1980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구속된 다른 동료들처럼 그도 조사 과정에서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를 고문한 수사관이 "이재문이도 (내 손에서) 개구락지 여러 번 됐어"라고 으스댔다는 것이 사건 관련자들의 증언이다. 함께 사형을 선고 받은 신향식이 이듬해 처형된 것을 생각하면, 그가 옥사하지 않았더라도 오래 더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국의 발표대로 이재문은 어쩌면 공산주의자였는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어떤 구성원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 사회는 어떤 구성원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그를 '개구락지'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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