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20일 삼성전자에서 가불금 명목으로 돈을 빌려 노태우 전 대통령에 비자금을 제공한 이건희 삼성회장에게 7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을 계기로 재계에 비자금 소송 비상이 걸렸다.특히 최근 불법 대선자금수사를 받고 있는 삼성, LG, 현대자동차, 롯데 등 10여개 그룹들은 "이번 판결로 비자금 소송이 줄줄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재계는 회사 자금으로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에 대해 사법부가 소액주주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린 첫 사례라는 점에 주목하며 향후 소송가능성에 대비,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를 계기로 주주 대표소송이 러시를 이룰 경우 기업이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며 "사법부가 법리만을 따지지 말고 여러 상황을 고려해 현명한 판결을 내려주길 기대했는데…"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이번 대선 자금수사를 받고 있는 그룹들이 비자금 조성을 통해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총수와 임원들을 대상으로 업무상 배임죄 등으로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실 검찰이 이번 대선자금 수사를 하면서 기업들이 정치자금 제공내역을 '자백'하면 처벌을 최소화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는데, 기업들이 수사에 협조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비자금 조성사실을 공개하면 형사적 처벌이 문제가 아니라 소액주주나 시민단체에 의한 배상소송이 더욱 걱정이라는 것이다.
당사자인 삼성은 이날 "사법부의 판단을 겸허히 존중하겠다"면서도 "법리검토 후 상고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혀 사실상 상고방침을 시사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당시 비자금 제공은 오히려 그룹과 경영권, 주주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보험 성격이 강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기업이 불법 비자금을 조성해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면 수사당국이 과거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수사 때와 마찬가지로 기업인들을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경영 투명성을 강화하고, 기업지배구조 선진화도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제 투명 경영은 기업 생존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의춘기자 eclee@hk.co.kr
박천호기자 tot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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