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사건'은 반(反)유신 세력들에게 적지않은 혼돈을 안겼다. '박정희=유신'의 논리로 유신세력이 필연적으로 붕괴될 것이라는 낙관론과 자연인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이므로 기존 유신세력이 그 공백을 자연스럽게 메울 것이라는 비관론이 혼재했다. 재야단체들은 76년 '3·1절 민주구국선언'을 계기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국민연합'으로 연대를 이루었고, 긴급조치가 양산한 제적생과 복학생들은 78년 8월 결성된 '민주청년인권협의회'를 정제해 '민주청년협의회(민청·民靑)'를 이끌고 있었다. 국민연합 내부에서 낙관론이 주조를 이루었던 반면 민청 쪽에서는 비관론이 적지 않았다.11월 3일 국장(國葬) 이후 10일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의 특별담화가 발표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거, 빠른 시일 내 개헌'이었다. 10·26 다음날 미 대사관측은 민주연합 몇몇 관계자들을 불러 한국의 정정(政情)에 대한 비공개 브리핑을 했다. 이 자리서 대사관측은 "한국은 결국 문민화 쪽으로 가게 될 것이니 과격한 행동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민주연합측은 특별담화를 자연스런 수순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민청측은 10·26 사건의 수사를 맡고 있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신중론을 견지했다.
특별담화가 발표된 며칠 뒤 세종로 민청 사무실에서 이우회(李祐會·현 한마당출판사 대표) 민청 회장, 최열(崔冽·현 환경대단 대표) 민청 부회장 등 8명이 모였다. 당시 이 모임에 참석했던 이신범(李信範) 전 국회의원의 증언. "이른바 '최규하 구상'은 유신세력에게 유리한 내용이었다. 유신체제의 조속한 청산과 3개월 내 민주헌법 제정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 군중집회를 열기로 했다. 시위가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신군부의 의도에 리트머스 시험지를 대는 효과는 있다'는 결론이었다. 계엄으로 모든 집회는 사전허가를 받도록 돼 있었다.
5·16쿠데타 직후인 62년 서울예식장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군정연장 반대 시위를 벌였던 적이 있었음을 상기하며 '위장결혼식'을 구상했다. 국민연합 공동의장인 윤보선 전대통령, 함석헌 선생, 김대중씨와 직·간접적으로 협의를 했다. 윤 전대통령은 스스로 표면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며 부인 공덕귀씨를 통해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김대중씨의 경우 연금 상태인데다 신군부쪽에서 크게 신경을 쓰고 있으므로 제외했다(며칠 뒤 김씨는 아들을 통해 집회에 반대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함석헌 선생을 대회장으로 하고 명칭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 국민선언 대회'로 결정했다."
양순직(梁淳稙)·박종태(朴鍾泰) 전 공화당 국회의원, 김병걸(金炳傑) 자유실천문인협 대표, 백기완(白基玩) 백범사상연구소장, 임채정(林彩正) 동아투위 위원이 5명의 공동위원장에 추대됐다.
'홍성엽군과 윤정민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79년 11월 24일(토) 오후 5:30 YWCA 1층 강당(명동성당 앞)' 민청 운영위원이었던 홍성엽(洪性燁·당시 25세)씨가 신랑 역을 자임했다. 연세대 사학과 출신의 홍씨는 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복역한 적은 있었으나 당시까지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구속자가족협의회에 몸담고 있던 그의 홀어머니도 아들의 가짜결혼식을 이해하고 참석을 약속했다. 민정(民政)이란 말을 뒤집어 가상의 신부 윤정민을 만들었다. 가짜 청첩장은 비밀 유지를 위해 홍씨의 친지들에게까지 '진짜로' 돌려졌다.
가짜 결혼식임을 알고 있는 많은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명동 진고개 주변 곳곳을 메운 가운데 YWCA에서 '국민선언 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민청과 국민연합 측에서 계획했던 가두행진 시위는 성사되지 못했다. 냄새를 맡고 대기 중이던 경찰에 의해 200여명이 연행됐다.
포고령 위반(불법 집회·시위)으로 연행됐으나 다음날 내란음모 혐의로 변했다. 27일 계엄사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유신체제의 조기종식으로 헌법개정과 개인적 신분제약 해소를 기도하고 나아가 집권까지 기대하는 환상세력이 주도한 탐욕의 불법집회였다. …전 대통령과 구 정치인이 배후에 숨어 순수한 일부 청년들을 선동, 전위대로 삼아 그들의 야망을 달성하려던 정치적 욕망이 깔려 있다"면서 "18명(구속14, 불구속4)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10명을 수배했으며, 122명을 즉심 또는 훈방 조치했다"고 밝혔다.
계엄사는 윤보선 함석헌 김병걸씨와 박종열(朴鍾烈) KSCF간사 등 4명을 불구속 입건한다고 발표했으나 윤보선씨를 제외한 3명은 사건 직후 모두 보안사에 끌려가 2주일 이상씩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유신체제 때 중정의 고문·구타는 신군부 당시 보안사 서빙고분실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군부에 대한 반유신 세력들의 인식이 뚜렷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기존의 유신세력이 박정희의 공백을 급속도로 메워나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80년 초 '서울의 봄' 상황에서 모든 구호는 '계엄 철폐'로 모아졌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관여했다가 도피, 수배자 명단에 올랐던 인사들은 이듬해 5월 한 명도 빠짐없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계엄사령부에 검거된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행사 주도한 당시 民靑부회장 최 열
10·26 이후 거의 매일 모였다. '국장 반대'를 천명하자는 견해도 있었으나 최규하 대행의 발표를 보고 행동을 결정하기로 했다. 10일 특별담화에서 뚜렷한 민주화 의지보다 막연한 음모 같은 것이 느껴졌다. 12일 국민연합이 거국 민주내각 구성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13일 민청은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보궐선거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보다 적극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군중집회를 열기고 결정하고 한국기독교학생회 총연맹 김정택(金正澤) 회장에게 협조를 구하는 한편 민주연합과 연대를 계획했다.
민청측이 대회를 준비하고 민청 부회장인 내가 실천 계획을 담당했다. 윤보선 전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가 재야그룹과의 연락을 맡았다. 결혼식을 가장하기로 하고 일반인이 많이 참여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검토했다. 토요일인 24일, YWCA 강당을 예약했으나 시간은 오후 5시 반 밖에 잡을 수 없었다.
결혼식날 나는 입구쪽 동향을 잘 살피기 위해 신랑측 축의금을 받기로 했다. 신부측 축의금 접수대엔 민청 운영위원 강구철(姜求哲)씨가 앉았다. 주례는 '운동권 신랑'답게 함석헌 선생을 모셨고, 사회는 기청 회장인 김정택씨가 맡았다.
축의금을 들고 온 진짜 하객들도 있었지만 위장 결혼식 참석자가 더 많았다. 400여명의 손님이 강당을 채운 것을 확인한 사회자가 "신랑 입장"을 선언했고, 그것이 신호였다. 헌정동우회 박종태 전 의원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어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통대선거 결사반대' '거국내각 수립하라'는 구호가 이어졌다. 13일의 성명서 유인물이 뿌려지는 순간 사복경찰들이 난입했다. 식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200여명이 닭장차에 태워졌다.
모두 중부경찰서로 연행됐으나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박통이 죽었는데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자 경찰은 "미안하다. 조금만 기다리면 풀어 줄 테니 참아달라"며 오히려 우리를 달랬다. 나를 포함해 반 정도의 인원이 그날 밤 용산경찰서로 분산 수용됐다. 조서도 대충대충 받았다. 나는 "공해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며 "시골서 올라온 결혼 축하객이며 동동주나 먹으러 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조서 말미에 'C급'이라고 적었다.
25일 아침 귀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 새벽 모처로부터 경찰서에 20여명의 명단이 첨부된 전통문이 떨어졌다).
갑자기 헌병 짚차가 군용 트럭 한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인솔자인 듯한 장교가 이름을 죽 불렀다. 내 이름도 있었다. 앞으로 나가니 그는 공손하게 "트럭에 타십시오"라고 말했다. 올라서자마자 무언가에 목덜미를 얻어맞고 엎어졌다. 옆을 보니 나이 지긋한 재야인사 몇 분도 엎어져 있었다. 트럭은 곧바로 서빙고동으로 달렸고 우리는 1명씩 분리돼 지하실로 끌려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홀랑 벗기더니 4명이 둘러서서 마구 때렸다. 어느새 나는 'A급'으로 분류돼 있었다. 한 조사관은 한 동안 나를 구둣발로 차더니 "너가 (내란 모의 사실을) 빨리 자백하지 않아 내 구두가 찢어졌다"며 다시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기절을 하고 싶었으나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한 나를 그들은 '플라스틱 인간'이라고 부르며 웃어댔다. 서울구치소로 옮겨지기 직전 샤워를 하도록 했다. 처음 거울을 보았다. 얼굴이 퉁퉁 부어 스스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옆에 있던 박종태 양순직씨 등 두 어른을 보니 온 몸이 가지색으로 멍들어 있었다.
'통대선거 반대와 유신잔당 퇴진'을 조총련이나 북괴와 연관 지으려 하는 수사방침을 확인하면서 신군부 쪽의 저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진짜 하객이나 비운동권 참석자를 대상으로 많은 허위자백을 강요했다. 춘천에서 온 한 하객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쪽과의 관계를 자백하라며 심한 고문을 받았다.
계엄사의 대응은 유신 때보다 훨씬 과격했다. 우리의 주장 속에는 계엄사 혹은 군부에 대한 적대감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 대한 심각한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것은 전혀 의외였다. 그들의 목적은 포고령에 적시한 '시위 금지'가 아니었다. 징역2년을 선고 받고 복역 중 81년 3월 3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 특사로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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