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7시반이면 식당으로 출근하는 의사가 있다. 조리실과 식당을 가르는 칸막이 뒤에 서서 노인들의 식사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가 지난 6년간 하루도 거르지않고 지켜온 아침 일과다. 365일을 한결같이 보아온 노인들, 아침 식탁에 앉은 그들의 표정만 봐도 몸이 편찮은지, 가정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한눈에 파악된다. 국내 실버타운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이종균 송도병원 이사장 겸 서울시니어스타워 대표이사(53). "누구나 늙는다"고 운을 뗀 그는 "사람마다 자기 삶의 지표가 다르지만 내겐 나를 믿고 행복한 말년을 보내는 노인들이 많아지는 것이 바로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라고 말했다.최초의 도심형 실버타운 설립자
서울 중구 신당3동에 자리잡은 국내 최초의 도심형 실버타운 서울시니어스타워. 개원한지 6년째지만 입주를 기다리는 대기자 명단이 100명을 넘는다. 노인들 사이에선 '청와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소리가 나오는 인기 실버타운이다. 1998년 개원 당시만 해도 실버타운에 부모를 모신다는 것은 불효로 인식됐다. 또 시골 지주들이 '땅 놀리면 뭐하냐'는 차원에서 만들었던 무수한 전원형 실버타운들이 유배지로 인식되면서 실패를 거듭했다. 이때 그는 과감하게 서울 도심에 실버타운을 건립했다.
"늙을수록 소외감과 고독감이 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가족과 멀리 떨어져 시골생활을 하라는 건 유배지에 감금하는 것과 같아요. 도시의 활력과 각종 문화혜택을 골고루 받을 수 있는 곳에 실버타운이 있어야 가족들도 자주 찾아올 수 있고 활기찬 노후생활이 가능합니다."
개원 초기에는 노부모가 계약을 하면 다음날 아들이 와서 계약서를 찢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자식 체면을 구긴다' '쓸데없는 데 돈쓴다' 등등 이유도 갖가지였다. 그러나 노인들의 생활패턴을 최대한 고려한 안락한 시설과 운영방식이 점차 입소문을 타면서 서울시니어스타워 입주는 이제 성공한 노년을 의미한다. 실버타운에 입소해 살겠다며 비자금을 모으는 중장년층도 드물지않다. 시니어스타워는 강서와 분당에 지점을 냈다.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않는다
"6년만에 실버타운이 3곳으로 늘었으니 엄청 빨리 성공했다고들 해요. 그렇지만 제겐 이 사업이 20년 동안 계획하고 추진했던 겁니다. 사람들은 결과물을 보지만 제겐 건물안에 설치된 자동감지장치 하나까지 직접 구상하고 개발하며 보낸 오랜 세월들이 녹아있습니다."
이종균 대표가 실버사업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조선대 의대를 졸업하고 외과전문의 수련을 끝낸 뒤 미국에서 대장항문과 전문의 공부를 하던 1981년부터였다.
9남매중 여덟째. 아버지는 예과 2년때 돌아가셨고 형제자매 뒷바라지로 허리가 휘는 노모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나도 늙을텐데…' 하는 생각을 늘 해오던 그였다. 그것이 노인복지시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어차피 외과의사는 나이들면 못한다. 생명을 담보한 수술대에서 손이 떨리거나 무릎이나 허리에 이상이 오면 칼을 들 수 없다.
공부를 하면서 시간만 나면 미국내 실버타운을 방문해 조사와 연구를 병행했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시니어스타워에 적용됐다. 타워안은 모든 층과 방들이 다 평면설계됐다. 노인들은 발을 끌고다니기 때문에 0.5㎝의 단차만 나도 넘어져서 치명적인 골절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나이들수록 온도에 민감해지는 것을 감안, 항상 일정한 실내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바닥과 덕트, 에어컨의 3중 환기시스템을 설치했으며 건물 곳곳에 가드레일을 달아 필요시 몸을 의지할 수 있게 했다.
건물안 모든 벽면에는 반경 10m안에서 울리는 경보음을 자동감지할 수 있는 센서가 부착돼있다. 노인들이 갑작스런 통증이 있을 때 목에 걸고다니는 경보기를 누르기만하면 센서가 이를 포착, 프론트데스크와 응급실 중앙컴퓨터에 통보한다. 노인들이 기거하는 방 천장에도 자동경보시스템이 있어서 노인들이 일정시간 움직이지 않을때는 센서가 작동한다. 이 대표는 이 응급호출시스템을 직접 구상, 대학원에서 석사논문을 쓰기도 했다.
"최근 이사를 하면서 쪽지를 하나 발견했어요. 미국에서 공부끝내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앞으로 노인복지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구상을 적어놓은 쪽지였는데 정말 구상한 그대로 해왔더군요.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황혼이혼 엄포놔도 아내는 훌륭한 내조자
금요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 7시반에 서울시니어스타워 식당으로 출근, 노인들의 식사모습을 지켜본 뒤 송도병원 사무실로 간다. 이때부터 대장항문 전문의로서 각종 수술과 검진을 마치고 오후7시면 다시 실버타운 전문가로 변신한다. 서울과 강서, 분당시니어스타워와 최근 인수한 양평의 너싱홈 건설과 관련된 업무를 보고 집에 들어가면 밤 12시. 일년이면 자정전에 집에 들어가는 날이 열흘이나 될까 싶다. 금요일은 송도병원이 운영하는 하남치매센터에서 근무하는 날이다. 하남치매센터에는 올해 95세된 노모가 입원중이다. 노모는 서울시니어스타워에 거주하다 치매가 오면서 하남치매센터로 옮기셨다.
"워낙 일이 많으니까 가정엔 아무래도 소홀하게 되죠. 가끔 아내가 '황혼이혼 당하고싶냐'고 엄포를 놓아요. 혼자 생각에도 좀 미안해서 지난 4월 결혼기념일에는 맘먹고 제주도 여행을 3일간 갔다왔는데 이게 또 말썽이 났지 뭐예요. 아내가 감격했는지 마지막날 김포공항에 도착해서는 '지난 3일이 하루같아' 그러길래 무심코 '난 2주일은 된 것 같은데' 했다가 정말 이혼당할 뻔 했어요. 한 일주일은 아예 말을 안하더라구요. 그렇지만 병원에 실버타운에 치매센터에 벌여놓은 일이 많은데 걱정이 좀 많아야지요."
볼멘소리를 해도 아내는 훌륭한 내조자다. 노인들이 사는 곳인 만큼 환경을 늘 새롭고 안락하게 바꿔줘야 한다. 그 인테리어와 식당 음식상태를 체크하는 것을 도맡아 해줘서 늘 고맙게 생각한다. 딸만 셋. 심리학을 전공하고 야간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있는 큰 딸은 서울시니어스타워의 인턴사원으로 맹활약중이기도 하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돈이 아닌 사명의식
사실 실버타운은 돈되는 사업이 아니다. 실버산업의 최대강국이라는 일본에서도 전국에 있는 22개 실버타운중 가장 잘되는 곳이라고 해야 순수익이 연매출의 1%에 불과하다. 주변에서는 실버산업으로 돈벌었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신당동이나 강서시니어스타워 운영비의 상당부분은 송도병원의 수익금으로 채워진다.
"외과의로 트레이닝을 받는 동안 죽는 사람을 숱하게 봤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쓰리아웃' '포아웃' 되뇌이는 그 심정은 말로 다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삶을 판단하는 기준이 돈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인가, 마지막 순간에 그 어려운 숨 한번이라도 더 쉬겠다고 바둥대지 않고 '그래 이제 가자' 며 탁 놓을 수 있을 것인가를 늘 생각합니다. 골프나 치고 호사스러운 삶을 산다면 절대 그럴 수 없을 거예요."
이 대표는 앞으로 노인건강검진 분야에 좀 더 몰두할 생각이다. 실버타운과 너싱홈, 치매센터 등을 차례로 만들며 쌓아온 노하우로 호주에 진출해 서구인들을 대상으로 실버사업을 할 계획도 갖고있다. 이미 호주 골드코스트의 리지밀이라는 곳에 2만5,000평 가량의 부지를 확보한 상태.
이 대표는 "한국에서는 실비로 했지만 호주에서는 '따끔하게' 받아보자는 생각도 갖고있다"며 싱긋 웃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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