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틀 뒤인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에 이 신문사 사장 겸 주필 장지연(張志淵)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오늘 목놓아 크게 우노라)이 실렸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사이에 체결된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고 통감부 설치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공식적 한일합방은 이보다 다섯 해 뒤의 일이지만, 일본은 이 조약 이후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시일야방성대곡' 후반부는 이렇다."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득을 바라고 덧없는 위협에 겁을 먹어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달갑게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4천년 강토와 5백년 종사를 다른 나라에 바치고 2천만 생령(生靈)을 몰아 다른 나라 사람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저들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 및 각 대신은 족히 깊게 나무랄 것도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대신(한규설: 인용자)이란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라, 다만 부(否)자로 책임을 면하여 이름을 남기는 밑천이나 꾀하였단 말인가? 김상헌이 국서를 찢고 통곡하던 일도 하지 못하고 정온이 칼로 할복하던 일도 못하고 그저 편안히 살아 남아 세상에 나서고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를 대하며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를 대하겠느냐.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만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말 것인가! 아!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황성신문은 그 즉시 무기 정간되고 장지연도 구금되었다. 얄궂게도, 장지연은 한일합방 뒤 일본의 황백대결론(黃白對決論)을 받아들였고, 범아시아주의를 매개로 친일로 돌아섰다.
고종석
/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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