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에 잃어버린 아이를 제외한 우리 집 7남매는 요즘도 가끔씩 부천의 공동체 시절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집에는 함께 먹고 자는 식구 아닌 식구들이 언제나 10여명씩 있었으니 그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딸들은 옷 갈아 입기도 어려웠다고 불평을 늘어 놓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혜영이는 중학생으로 서울에서 누나와 자취를 하면서 "강원도 가서 감자밥을 먹어도 상관없으니 우리 식구들끼리만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불만까지 털어놨다고 한다.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따로 나의 신조나 신념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공동체에 들어온 전쟁고아나 병자, 부랑자를 형, 오빠라 부르면서 함께 사는 동안 베푸는 사랑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고귀한 정신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자선단체들이 보내오는 구호품 옷가지를 골라 입혀도 크게 미안하거나 안쓰럽지 않았다. 아이들도 그런 환경에서 자란 때문인지 넓고 너그럽게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기른 것 같다.
넷째딸 혜덕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할 때였다. 대학입학시험인 예비고사에서 경기지역 여자수석을 한 딸을 앞에 두고 나는 "그 정도면 서울에 있는 교대를 가는 것도 좋겠구나"라고 했더니 혜덕이는 "외딴 섬 같은 오지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지방대학으로 갈 겁니다"라는 게 아닌가. 항상 낮은 대로 임하라고 가르쳐온 내가 한방 먹은 기분이었지만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엇다. 혜덕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인천교대를 나와 벽지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이제는 남편을 따라 농사일을 하고 있다.
넷째 부부는 우리 부부와 닮은 구석이 많다. 보통학교를 나온 내가 여학교를 졸업한 집사람을 만났듯이 중학교를 졸업한 사위도 대학을 나온 넷째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사위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졸업한 뒤로 우리 농장에 들어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성실한 사람됨에 넷째가 이끌려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처음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주변에서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옛날 장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집사람이 "저 사람이 바로 내 사윗감이야"라고 단호하게 밀어붙여서 혼인을 성사시켰다.
큰 아들 혜영이는 고등학생 때부터 현실참여적인 행동에 앞장섰다. 나는 아이들의 판단과 행동이 그릇된 방향만 아니면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혜영이는 그 뒤로 서울대 학생회장에 이어 줄곧 자신의 소신대로 민주화 투쟁에 헌신했다.
혜영이가 자신의 일로 나와 상의한 적은 많지 않지만 그 가운데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경복고를 다니면서 학생회 간부를 맡을 때인데 상의할 것이 있다며 나를 찾았다. "아버지, 이번에 전교생이 다 일어나 데모를 할 계획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라는 것인데 자초지종은 이랬다. 당시 한일수교협상 문제인가로 대다수 고등학교가 대대적인 항의데모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경복고만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학생회장이 정학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학생회장을 대신해서 데모를 이끌 생각이냐"고 내가 물었더니 "우리만 좋은 대학가겠다고 정학된 친구를 그냥 둘 수는 없잖습니까. 학생회장을 구해내기 위해 일어서는 겁니다"라는 것이었다. 친구 구명을 하겠다는데 나로서도 더 할말이 없었다. 그 일은 당시 학교교장이 나서서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바람에 데모없이 무사히 처리됐다고 들었다.
대학을 들어간 혜영이는 학생회장에 선출돼 민주화 투쟁을 이끌면서 수배와 도피생활을 거듭해야 했다. 부모의 마음이 그런 것인지 도피 중에는 '한데서 자는 건 아닌지, 밥은 챙겨먹는지' 등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일단 체포되면 마음이 놓이곤 했다. 적어도 숙식과 거처는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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