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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생존자 말하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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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생존자 말하기대회

입력
2003.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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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라는 스무 살 먹은 여학생이 있다. 몇 년 전 집에 혼자 있을 때 작은 아버지 B에게 순결을 빼앗겼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안 어머니는 남편에게 항의했고, 남편의 반응이 시답지 않자 모시고 사는 시부모에게도 알렸다. 그러나 시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주장은 B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며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A의 몸가짐에 더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A는 그 뒤 거의 말을 하지 않게 됐으며 남자만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이 문제는 부부싸움으로 이어졌고 A의 어머니는 끝내 딸과 함께 그 집을 나와 따로 살고 있다.■ A모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경찰서 성폭력상담소와 같은 고발·상담기관을 찾을 생각도 했지만, 그래 본들 상처가 치유될 리 없으며 오히려 덧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여성에게 가장 말하기 어려운 것은 성폭력 피해다. 법에 호소하는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소송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실제로, 지난달에는 다섯 살 때 성추행 당한 어린이가 법정 증언을 거부한다고 법원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일이 있다. 5년도 넘게 투쟁해 온 어머니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재판부는 검찰·경찰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 남성에 의해 파괴된 삶을 복원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말하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최근 번역출판된 성폭력 탐구서의 제목도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였다. 성폭력 경험자인 저자는 자신이 겪은 일과 그 이후의 삶을 이야기해야 공감과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말에는 심신의 치유기능과 정화기능이 있다. 대화치료와 상담은 그래서 중요하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커밍 아웃은 벽장 속에서 나온다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들도 말을 함으로써 벽장에서 나와 새 삶을 일구는 힘을 얻을 수 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위해 '생존자 말하기대회'를 연다고 한다. 생존자는 피해를 되돌아 보고 이를 극복하려는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개최일시와 장소는 비공개이며 남자들은 참석할 수 없다. 이 행사에서 들은 이야기를 발설해서는 안 된다. 고백이 이루어지는 동안 자리를 떠서도 안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를 통해 생존자들이 서로 힘을 주고받게 되기 바란다. 부천서 성고문사건(1986년)의 권인숙씨도 참담한 경험을 공개함으로써 그 자신을 바꾸고 민주화와 양성평등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임철순 수석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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