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맑은 물이 1,000리를 간다. 전북 장수군에서 발원해 군산포로 잦아들 때까지 섞여 드는 지천이 굵은 놈만 20여 개. 지천 하나에 100리씩 만 쳐줘도 한반도와 키를 맞대는 물길이다. 그 실핏줄들이 충남·북, 전북 3도의 속살을 헤집으며 긴 세월 숱한 마을과 너른 들을 적셨다. 그리고 뭇 생명을 길렀는데 그 중에 '참게'도 있었다. 참게라는 놈은 연어와 반대로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위수지역에서 산란한다. 부화한 어린 놈들이 물길을 타고 올라 강과 도랑 논두렁 가에서 주민들과 섞여 자라다가, 산란철이 오면 물 따라 내려가는 것이다.그래서 금강 사람들은 가을이 오면 조바심이 났다. 서둘러 추수를 끝낸 뒤 '긔(게) 내리는' 물길 목을 지켜서야 했기 때문이다. 9∼11월 살 찌고 알 밴 참게 맛은 12첩 반상 임금님 수라에도 빠지지 않던 진미라, 돈을 사도 짭짤했고 일년 내내 생광스런 반찬이기도 했다. 지금이 딱 그맘 때지만, 금강 하구 둑 공사를 시작(1983년)하면서 산란터를 잃은 참게도 차츰 씨가 말랐던 것인데…. 그 가을의 진객, 참게가 몇 년 전부터 금강 샛강 여기 저기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은 들떠 있었다.
칠갑산(충남 청양군) 아래 대치면 작천(鵲川)리와 장평면 지천(之川)리도 금강 치마폭에 드는 작은 마을이다. 계류가 굽이쳐 흐르며 아홉 구비 '지천구곡'을 이루는데 작천리 주민들은 이 물을 '까치내', 지천리에서는 '갈내'라고 부른다. 주민들은 8월 말께부터 여울목을 따라가며 보를 쌓아 통발도 놓고, 그물을 쳤다.
작천교 위뜸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황준(72)씨는 올해 400마리 남짓 잡았다고 했다. "읍내 영업집이서 서로 자기네한테 돌라꼬 찾아와." 그는 앉은 자리에서 어른 손바닥을 덮는 큰 놈은 6,000∼7,000원, 작은 놈은 5,000∼6,000원을 받고 판다. 9,10월에 잡는 놈은 주로 매운탕 용이고, 튼실하게 알을 밴 이맘 때 참게는 모두 간장게장을 담가 판다. 10마리 한 통에 무조건 10만원인데,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옛날에? 그 때야 참게를 잡들 않고 주웠지유. 그냥 밤 마실 가대끼 뒷짐지고 물가에 나가믄 됐시유." 왕년의 추억은 늘 부풀려지기 마련이라, 가을 까치내는 하나도 안 보태고 '물 반 참게 반'이었다고 했다. 여울목 흐르는 물길을 따라 싸릿대로 비스듬히 발을 치고 두 뼘 가량 물길을 튼 자리에 짚으로 고깔 모양의 1평 반 게막을 얹었다. 참게는 야행성이라 물 따라 지나치는 거무튀튀한 참게를 식별하기 위해 게막 안 자리 물길에는 하얀 차돌이나 사금파리를 부숴 깔아놓는다. "많이 집어 낼 때는 하루에 500마리 씩도 했쥬." 웬만한 게막 한 채가 논 닷마지기보다 값나가던 시절이어서 게철이 오면 밀개떡 쪄서 도깨비 고사도 지냈다고 했다. "그 때는 도깨비가 많았어. 인사를 안 챙기믄 해찰을 부리는디, 사람들 속으라고 소똥을 강에다 막 떠밀어 보내는겨." 정대석(67)씨는, 퍼뜩 지나치는 놈을 움켜쥐고 보면 소똥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게막이 없는 집에서는 식구들마다 카바이트 칸델라불이나 관솔불, 솜방망이 횃불을 들고 징검다리나 보로 나섰다. 새끼로 10마리씩 엮어 20리 길 청양장이나 40리길 부여장에 내다 팔면 국밥 한 그릇에 보리쌀 한 말은 바꿔왔다니, 참게잡이가 웬만한 농사보다 나았다는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닌 셈이다.
농가에서 먹는 참게는 대개 다리가 부러졌거나 상처가 난 놈들이었다. 더러 여유있는 집에서는 시래기 넣고 매운탕을 끓이기도 하지만, 주로 게장을 담갔다. 사나흘 재워 한 달 내에 먹어야 하는 꽃게장과 달리, 속이 단단한 참게는 달인 장을 예닐곱 번 씩 갈아 붓고 석 달은 재워야 맛이 배는 대신 1년이 가도 살이 삭지 않는다. 그렇게 담가둔 참게장은 새 봄 가정방문 오는 선생님 밥상이나, 윗대 귀한 친척어른 상차림에나 어렵사리 오른다. 간혹 입맛 잃은 부모님 봉친(奉親) 상에라도 오를라 치면 게딱지는 언감생심, 다리 짝 하나에도 울대를 움찔대던 기억이 금강마을 사람들에게는 생생하다. 천신(薦新)하는 귀한 음식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마을 주민들조차 올해 참게 맛 못 본 이가 허다했다.
산란터를 잃은 참게가 까치내에 되돌아온 것은 충남도가 96년부터 인공부화 한 어린 게를 방류한 덕택이다. 까치내 물길을 이용해 참게 인공부화와 양식에 성공한 자칭 참게 전도사 명노환(56)씨가 95년 안을 낸 것을 도에서 선뜻 받아들인 것. 어른 손바닥만한 참게가 다시 나타나자 그 사이 청양·부여군에만 60여 명의 없던 전업 어민이 생겨났고 주민들이 소리 소문 없이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는 청양군이 가세하더니, 올해 부여군이 나서는 등 인근 3도 8개 시·군이 매년 적으나마 어린 게를 방류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명씨가 양식장(충청수산)에서 부화시켜 기증한 것도, 도 내수면연구소에서 부화시킨 것도 있다.
인공양식 특허까지 얻어 둔(98년) 마당에 자연산 참게가 금강 지류에 지천으로 깔리면 사업에 손해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명씨의 대답이 걸작이다. "비싸서 못 먹고, 몰라서 못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유? 수요는 걱정 마세유. 농민들은 참게 나서 좋고 도시 사람들은 싸게 맛 봐서 좋고, 다 좋자는 일이지유." 그는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그의 꿈은 금강 본·지류 3,000리 물길 전체가 참게장(場)이 되는 것이다.
/청양=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금강을 참게목장으로"
양식 참게에는 사료대와 시설비 인건비 전기료 등을 따져 마리당 기천원의 돈이 먹힌다. 반면에 종묘만 풀어두면 금강이 참게를 먹여 살릴 터라는 것이 금강 참게목장화 사업 발상의 출발이다. 아래로 금강하구언이, 위로 대청댐이 막아 섰으니 참게들이 어디로 가겠냐는 것이고, 그게 모두 마을 소득원이라는 것이다. 죽은 물고기나 수초 를 뜯어먹고 사는 놈들이다 보니 부영양화 걱정 없고, 수질정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명노환씨가 총대를 매고, 지역 환경·시민단체 등이 몇 차례 정부와 도에 건의를 했다. 이들의 제안은 가끔 반향도 있어 뭔가 움직이는 듯 하다가, 주무 장관이 경질되면서 매번 수포로 돌아간 모양이다. 지자체들이 몇 만 몇 십만 마리씩 방류하는 것은, 한강에 돌 던지는 격이니 정부가 작심하고 나서야 할 일이라고 한다. 말끝마다 농민을 걱정하는 정부가 얼마를 대고, 충남북과 전북도, 대전시가 또 조금 보태고, 강을 끼고 있는 13개 시·군이 십시일반 내면 어렵지도 않을 일이라는 게 주민들의 생각이다.
게막 쳐서 옛 방식으로 참게를 잡는 것도 훌륭한 생태체험관광 자원이고, 주민들이 쏘가리 다음으로 쳐주는 참게 매운탕이며 간장·양념게장도 손색없는 향토먹거리. "소득 2만불 시대가 되면 여행을 가도 다들 하루씩 자고 오게 된담서유?" 민박도 소득이고, 칠갑산 콩이며 감이며 밤 등 농산물을 팔 수도 있겠다는 게 주민들로서는 다 서있는 계산인데, 그렇게만 된다면 도하개발아젠다(DDA)가 됐든 자유무역협정(FTA)이 됐든 살아갈 만 하겠는데, 그 놈의 정치하는 것들은 '주둥이만 살았지 뭘 모르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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